[유강하의 대중문화평론] 자본과 욕망, 과학기술의 만남, 불온한 유토피아, “패러다이스”

유강하 2023. 8. 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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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을 거래할 수 있다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거래’에 대한 상상력 혈액이나 장기 등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평등’하게 갖고 태어난 ‘수명’까지 확장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표정한 ‘자본’은
생명가치의 불균형을 공고하게 만든다
생명이 자본으로 거래되는순간, 세상에 똑같은 생명을 갖고
태어난 최소한의 ‘평등’은 무너진다

매일 오전 9시,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숫자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울고 웃는다. 색이 덧입혀진 숫자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지만, 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은 크게 요동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자가 된다면 돈으로 무엇을 사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돈으로는 뭐든 살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자본으로 거래 가능한 것들에 대해 말했다. 샌델은 이 책에서 전통적인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대리 사과, 혈액 판매, 사망 채권과 같은 문제를 언급했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돈으로 거래나 구매가 가능한 목록이 아니라, 자본이 개입한 ‘거래’의 과정에 놓인 도덕과 윤리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는 인간의 욕망과 과학기술은 거래 가능한 목록을 점차 늘려가는 중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품목은 물건에서, 보이지 않는 서비스로 이동하고, 여기에서 다시 큰 폭으로 이동한다.

‘거래’에 대한 상상력은 혈액이나 장기 등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갖고 태어난 ‘수명’까지 확장된다. 수명을 거래할 수 있다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올해 넷플릭스를 통해 선보인 ‘패러다이스(Paradise, 2023)’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SF영화이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의 기술로 정복하지 못한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인간의 상상력을 따라잡는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들을 보여준다. ‘패러다이스’는 수명 기증을 합법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기업 에온(aeon)의 광고로부터 시작한다.

“더 나은 삶을 원하십니까? 에온(aeon)의 수명 기증 프로그램을 이용하시면, 공여한 수명에 따라 풍부한 보상을 약속합니다. … 기부한 시간만큼 풍요로운 인생을 돌려드리는 것이, 저희 에온의 신념입니다. 여러분의 꿈을 선택하세요.” 수명 기증이 곧 물질적 보상으로 이어진다는 광고는 비인간적이지만, 평생 난민의 신분으로 불안정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목숨이 유일한 재산인 난민촌을 돌면서 기증자를 찾는 공여자 스카우터의 제안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그 폭력성을 잊게 만든다. “[아버지에게] 미안하지만 살아생전엔 비자 발급을 못 받으실 겁니다. 이 시궁창에서 돌아가시거나 데니스랑 같이 추방당하겠죠. … [아들 데니스에게] 로또보다 확실한 게 이거야.” 합법적으로 시민권을 얻고, 작은 가게 하나를 차리는 게 소원이었던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열여덟의 소년 데니스는 떠밀리듯 서명을 한다. 이런 말솜씨 덕분에 스카우터 막스는 올해의 에온인이 된다.

시간 이식의 창시자이자 에온의 설집자인 조피 타이센의 연설은 꽤나 그럴듯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35세에 사망했어요. 얼마나 많은 귀중한 음악적 자산이 그의 이른 죽음으로 사라져 버렸을까요?” 그가 만약 80세까지 살았더라면, 혹은 150세까지 살았더라면, 프리드리히 실러, 넬슨 만델라, 마리 퀴리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인류는 더 진보를 이루지 않았을까? 그래서 에온은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을 수혜자 명단에 올려, 젊음을 돌려준다. 그들의 연구는 인류를 위해, 세상의 진보를 위해 봉사할 것이므로.

타이센의 연설은 합리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생명에 대한 폭력적 위계를 우아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 어떤 사람이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은 오로지 돈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타이센이 말하는 ‘인류’ 안에, 시간 공여자의 삶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표정한 ‘자본’은 생명 가치의 불균형을 공고하게 만든다. 생명이 자본으로 거래되는 순간, 세상에 똑같은 생명을 갖고 태어난 최소한의 ‘평등’은 무너진다. 에온에 반대하는 집단인 ‘아담’은 모든 수혜자들을 살해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한다. 막스와 그의 아내 엘리, 에온의 창시자 조피 타이센이 맺고 있는 파국적 관계는 상상적 미래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능한 현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에온’에 맞서는 그룹 ‘아담’의 이름은 극의 무게를 더한다. 흙으로 빚어진 자, 신의 형상을 닮은자, 모두 신의 호흡으로 생명을 얻은 자 ‘아담’. 과학기술과 인간(아담)의 욕망, 자본이 결합해 만들어진 ‘과학적 혁신’은 한 아담이 또 다른 아담을 파괴하게 만드는 과학적 합리를 제공할 뿐이다. 자본은 온갖 규제를 비웃듯이 넘나들며, 고요하게 폭력을 부추긴다.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고 했던 찰스 다윈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다.

태초의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 ‘패러다이스’, 누구나 낙원에서의 삶을 소망하지만, 모든 아담이 상상하는 낙원은 같지 않다. 서로 달리 상상하는 패러다이스를 쟁취하기 위한 폭력은 멈추어질 수 있을까? 자본, 과학기술, 인간 욕망의 결합은 제어할 수 없는 바람처럼 질주하고, 그 질주에 올라탄 또는 멈추려는 폭력의 질감은 더욱 거칠어질 것만 같다.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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