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오펜하이머, 다시 원자폭탄을 이야기하다

박영서 2023. 8. 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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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독일 유대계과학자들 핵폭탄원리 발견
아인슈타인 루스벨트에 獨보다 먼저 개발 촉구
1945.7.16 뉴멕시코주 알라모스서 실험 성공
1945.8.6 사상 최초 '리틀 보이' 히로시마 투하
무자비 살상무기지만 전쟁억지력 갖는 필요악

광복절인 15일 '오펜하이머'가 개봉했다.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생애를 다룬다. 영화 개봉과 함께 오펜하이머뿐만 아니라 원자폭탄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원자폭탄 개발과 투하, 이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연 원자폭탄은 인류에게 득(得)일까 독(毒)일까?

◇핵개발 단초 된 아인슈타인의 편지

1938년 독일의 과학자들은 실험 도중 우라늄 원자가 분열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듬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인류 최초로 원자로를 만들었던 엔리코 페르미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페르미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유대인이라 박해를 받자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식에 출석한 뒤 바로 미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었다.

핵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쓰고,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편지는 1938년 10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편지의 핵심은 "독일보다 앞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읽고 동감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극비리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 서명한 일을 후회했다.

◇3년 만에 뉴멕시코 사막서 "꽝"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미 육군 소장은 유대인 오펜하이머를 과학 부문 총괄로 임명했다.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주 산타페 근처의 '로스 알라모스 목장 학교'(Los Alamos Ranch School)를 비밀 실험실 부지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곧 학교는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로 다시 태어났고 1943년 3월 오펜하이머는 연구소 소장이 됐다.

조용하고 평화스런 이 곳에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가제트'라는 이름의 실험용 폭탄을 설계하고 개발했다. 1945년 7월 16일 새벽 뉴멕시코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이 실시됐다. 암호명은 '트리니티'였다.

직경 150cm의 둥근 '가제트' 중심에는 플루토늄 반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플루토늄의 무게는 약 6kg이었다. 소프트볼 크기의 플루토늄이 골프공 크기로 압축되면서 임계 상태에 도달했고 곧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불덩어리가 하늘로 솟아 오르고 거대한 버섯 구름이 그 주위에 피어올랐다. 폭발의 충격으로 텍사스주 엘파소의 건물까지 흔들렸지만 미국 정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 경찰은 군대 기지에서 폭발이 있었다고만 밝혔다.

한 남성은 기차를 타고 뉴멕시코로 가던 중 하늘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을 보고 운석이 떨어진 줄 착각했다. 그는 시카고의 한 신문기자에게 이를 제보했다. 기자는 이를 바탕으로 짧은 기사를 썼지만 연방수사국(FBI)의 압력으로 지면에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독일 포츠담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초초하게 '빅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 3년 만에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트루먼은 쾌재를 불렀다. 이는 분명히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비장의 한 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왜 일본에 원폭이 투하됐을까

핵실험이 진행되던 시기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소련 지도자 스탈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만나 종전 후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원자폭탄에 대한 기밀정보를 넌지시 알렸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졌다"고 스탈린에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에 심어놓은 첩보망을 통해 이미 폭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 역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계획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전임 루즈벨트와는 성향이 많이 달랐다. 트루먼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젊은 시절에는 백인 우월주의 단체 ' KKK' 단원이기도 했었다. 원자폭탄이 개발되자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미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이제 미국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소련이 될 것이 뻔했다. 원자폭탄의 힘을 보여준다면 소련을 다루기가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투하가 적어도 100만명 이상의 미군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전쟁의 종식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9일 나가사키에서 두번째 원자폭탄 '팻 맨'이 폭발했다.

나가사키가 잿더미로 변하기 2시간 전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에게 전달했다. 가급적 빨리 일본 점령의 지분을 챙기려는 심사였다. 9일 0시 소련 극동군은 일제히 만주와 한반도 북부, 사할린으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엄청난 속도로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은 시간 문제였다. 당시 미군은 1000km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었다.

대본영의 일본 지도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자칫하다간 일본 열도가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될 판국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더 걱정할 일은 패전에 따라 일어날지 모를 공산혁명이었다. 이러다간 천황제가 폐기될 수 있었다. 결국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최근 상당수 일본 사학자들은 이런 점을 들어 일본의 항복은 원자폭탄 투하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분할 점령됐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제안한 분할 점령안을 조건 없이 수락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가진 탓이 컸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원자폭탄 투하는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됐음을 보여준다

◇세계는 핵 경쟁, 판도라 상자 열리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이제 미국의 명확한 주적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소련이 됐다. 트루먼은 모든 전략의 초점을 소련 견제에 맞췄다. 그가 손에 쥔 가장 강력한 카드는 핵무기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에 핵을 투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소련 내 주요 도시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타슈켄트, 바쿠 등이었다. 당시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던 만주에서도 도시를 골랐다. 선양(瀋陽), 다롄(大連), 창춘(長春) 등이었다. 기밀 해제된 미국 국립기록보관소의 문서들은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경악할 만한 일이 터졌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RDS-1'은 '팻 맨'과 위력이 비슷했다. 미국은 소련이 핵을 개발하려면 최소한 10년 후에나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었다. 하지만 믿음은 빗나갔다.

이로써 미국의 핵 독점은 무너졌다. 동시에 핵 개발로 대표되는 냉전시대가 막을 올렸다. 1952년 영국이 세 번째로 핵클럽 가입에 성공했다. 미국은 수소폭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1954년 3월 남태평양 비키니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수소폭탄의 위력은 '리틀 보이'의 1000배 이상이었다. 1년 후 소련도 수소폭탄을 만들어 냈다. 이어 프랑스(1960년), 중국(1964년)이 핵 개발에 성공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펜하이머 등 과학자들이 만든 '핵폭탄'에 여전히 갇혀 있다. 핵무기는 폐기되어야 하지만 핵무기 없이는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게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은 핵무기 뒤에 숨겨진 과학만큼이나 복잡하기만 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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