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제3자 변제 후 구상권 행사 안 한다면 가해기업에 면죄부”
전주지법 이어 광주지법 기각
“공탁관 결정, 심사권 범위 내”
피해자 동의 없는 공탁 근거로
‘손해배상 취지 훼손’ 판단
정부 항고 입장, 공방 계속
“제3자 변제 후 가해기업에 구상권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가해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것.”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법원 공탁을 통한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지급하려 하자 법원이 잇따라 제동을 걸고 있다. 앞선 공탁 불수리 결정은 정당했다며 이의신청도 기각하고 있다. 피해자 동의 없는 공탁인 데다 제3자 변제 추진이 오히려 가해기업이 채무 면제나 면책과 같은 특권을 갖는 등 손해배상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광주지법 민사44단독 강애란 판사는 지난 16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이 양금덕씨와 이춘식씨를 상대로 낸 공탁 불수리 결정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정부를 대리해 공탁을 신청하고 이의신청을 제기한 재단은 “공탁관의 불수리 결정은 형식적 심사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 판사는 “피해자들이 제3자 변제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해 공탁관이 불수리 결정을 한 것은 형식적 심사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가해기업은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채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판결금을 변제한 이후 가해기업에 구상권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가해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전주지법도 지난 15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전주지법 민사12단독 강동극 판사는 재단이 강제동원 피해자인 박해옥씨의 자녀 2명을 상대로 낸 공탁 불수리 결정에 대한 재단의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강 판사는 “피해자의 반대의사가 있음에도 제3자 변제를 허용해 채권이 소멸하게 되면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가해기업이 사실상 채무 면제나 면책과 같은 결과를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해관계 없는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할 시 손해배상제도의 취지와 기능을 몰각시킬 염려가 있다”고 밝혔다.
두 법원은 모두 민법 제469조 1항을 들어 재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법 469조 1항에는 ‘피해자가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제3자의 변제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재단은 제3자 변제를 거부한 원고 4명 등 총 11명에 대한 공탁을 전국 법원 7곳에 신청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광주지법과 전주지법에서 이의신청 기각 판결이 내려진 만큼 다른 법원들에서도 같은 판단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17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피해자들의 채권 소멸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내놨던 공탁 카드가 오히려 법률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됐다”며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당연한 결과를 윤 정부만 아직까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전주지법의 이의신청 기각 결정에 항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광주지법 기각 결정에도 항고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돼 법정 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고귀한 기자 g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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