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영재학교’ 교장들 “교육과정 자율권 보장해야”
‘제2의 허준이’(필즈상 수상자)를 꿈꾸는 영재, ‘한국의 아인슈타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수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합리적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수 이공계 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과학고·영재고·자사고 교육과정에서의 자율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허우석 울산과학고 교장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하 한림원)이 1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제214회 한림원탁토론회에서 “이공계 분야 우수 인재를 선발 목적에 맞게 양성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등에 대한 자율성 강화가 중요한 요소”라고 밝혔다. 이번 한림원탁토론회는 ‘과학·영재·자사고 교장이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학생 선발과 교육’을 주제로 열렸다.
과학고, 영재학교, 자율형사립학교(자사고)는 우수 인재를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각 학교 설립 취지에 맞는 학생 선발과 교육,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 보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계에선 과학고를 포함한 고교체제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학고나 영재학교가 ‘이공계 우수인재 양성’이라는 설립취지에 맞게 적절히 운영되는지 돌아보고, 고질적인 ‘의대 진학 문제’ ‘사교육 유발 입시’ ‘폐쇄적 입시운영’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다.
과학고나 자율형 사립고교의 제한된 교육과정 편성권이 문제로 지적됐다. 허 교장은 “과학고가 과학기술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한 학교가 되도록 교육과정 자율성 보장과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른 영재학교로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적정 수준의 교원을 확보하고 경직된 신입생 선발제도를 바꿀 수 있게 교육부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고는 또 교육과정이 경직돼 있어 이공계 특성에 맞는 수업 진행이 어렵다”며 “과제연구(R&E)를 포함한 연구 활동이 교육여건 상 4학점 수준이 최대여서 영재학교(24~28학점 편성)에 비해 제한된 점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전국과학고교장단협의회(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과학고 교장들은 교육부를 방문해 “과학고를 영재학교로 전환해 달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과학고와 영재학교는 국내 이공계 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해 얼핏 유사해 보이지만 법적 근거가 다르다. 전국에 20개인 과학고는 초‧중등교육법을, 8개 있는 영재학교는 영재교육진흥법을 따른다. 이에 따라 교육과정 운영, 교원 임용, 학생 모집방식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재학교는 과학고와 달리 국가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를 필요 없어 대부분 ‘무학년제’로 운영하며 전국단위로 학생을 모집할 수 있고, 교재도 자유롭게 선택한다. 반면 과학고는 해당 시‧도에 거주하는 학생만 선발 가능하며, 정원 내 20%를 사회통합전형에 따라 의무선발해야 한다.
자사고 역시 교육과정에서의 자율 편성권 제한도 문제로 지적됐다. 김명환 상산고 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현재 자사고 교육과정에서 국어·영어·수학·한국사 교과목 비율 50% 이하 의무 편성 조항을 삭제하고, 자율편성 부분에 대한 완전한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고와 영재학교가 ‘영재’의 타고난 잠재력을 제대로 성장시키고, 육성하는지도 불확실하다. 오성환 서울과학고 교장은 “영재교육이 사교육을 받은 우수 학생들의 대입 통로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잠재력 있는 영재선발이 핵심”이라면서 “사교육 폐해와 교육과정 준수 논란, 선발 타당성을 둘러싼 문제 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학생 선발 방안이 필요하며 선발된 학생의 역량을 충분히 함양해 줄 수 있는 맞춤형 교육과정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진웅 서울대 물리교육과 교수는 “과학고, 영재학교, 자사고는 우리 교육의 ‘메기’, 쉽게 말해 정어리나 미꾸라지를 운반하는 수조에 메기를 넣어두면 물고기들을 건강하고 싱싱하게 운반할 수 있다는 메기효과를 생각하면 된다”며 “국가중심 교육과정 및 교원양성 체제를 유지하는 한국에서 획일화 및 비효율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나, 적절한 수준의 과학·영재·자사고 유지와 특성화는 창의적 교육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인공지능(AI) 및 인구절벽으로 특징화되는 초연결 미래사회를 생각할 때 끝없이 줄어만 가는 수학과 과학 교과의 교과과정 및 입시 비중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유연한 대입 시스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전국의 과학고를 모두 일반고로 전환하고, 소수의 과학영재학교만 남겨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나왔다.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는 수학올림피아드 출전 6명 전원이 서울과학고 출신이라는 점을 예시로 들었다. 송 교수는 “현재 서울과학고에 전국 영재가 과다하게 집중돼 있으며, 영재학교는 전국 영재를 선발해 각 지역마다 있을 이유를 상실했다”며 “8개의 과학영재학교만 남기고 전국 과학고는 모두 일반고로 전환하고, 과학영재학교는 가능하면 그 지역 중학교 출신만 입학 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송용진 교수는 “현재 과학영재학교와 과학고 상당수는 영재교육 전반에 대한 철학이나 명확한 교육에 대한 비전과 사명감 보다는 당시 상황에 따라 탄생했다”며 “이는 한국 초·중학생의 과다한 사교육과 학습을 초래하고 영재학교와 과학고 간 격차 유발, 영재교육기관으로의 기능을 상실한 과학고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를 위해 숫자를 제한하고, 과학 인재를 집중 양성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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