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자

기자 2023. 8. 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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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영어 수업이 그나마 덜 지루했다. 팝송 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가 공부의 따분함을 덜어줬다. 한덕수 국무총리만큼의 영어 학습 의욕은 없었던지 성적은 그냥저냥이었다. 그 시절 내가 만난 영어 선생님들은 좋은 분들이었지만 영어 발음은 안 좋았다. 독일어 시간으로 혼동할 만큼 경직된 영어 발음으로 학우들을 절망케 한 선생님을 기억한다. 고약한 발음이었음에도 정확한 억양을 중시하며 큰소리로 따라 읽게 했다. 선생님의 문법 설명은 탁월해 발음 장애를 상쇄할 만했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급진적’으로 풀이되는 형용사 ‘radical’ 어원은 ‘뿌리’에 있다. 뿌리의 다른 말은 ‘근본’이다. 본원적인 것에 매달리면 유연성을 잃는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급진적이다. 근본과 급진은 트윈스다. 두 유 언더스탠드?

선생님은 인문학적 해석 말고도 수량형용사 ‘a few’와 ‘few’의 차이를 설명할 때는 심리학을 동원했다. 같은 수를 셈하면서도 화자에 따라 ‘몇 개 있다’와 ‘거의 없다’로 표현될 수 있다. 없어진 것에 불만인 사람보다는 남은 것에 주목하는 사람이 속 편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학생이 ‘어 퓨’이기를 바란다며 수업을 마쳤다.

운 좋게 영어를 쓸 기회 없이 세월이 흘렀다. <어 퓨 굿맨>은 잊었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 영화였다. 헷갈리던 수량형용사의 용법을 정리해준 선생님 덕에 영화가 ‘몇명의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예측할 수 있었다. ‘어 퓨 굿맨’은 ‘소수 정예군’을 선발한다는 미 해병의 모병 선전 문구에서 따온 제목이다.

제섭 대령 역의 잭 니컬슨.

영화는 쿠바 관타나모만의 미 해병 기지에서 발생한 사병 살해 사건을 다룬 법정 드라마다. 해병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병사가 동료의 불법행위를 상부에 고발한 후 살해당한다. 피고 병사들을 변호하던 군법무관들은 윗선이 관여한 심증을 굳힌다. 최고 윗선은 기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제섭 대령(잭 니컬슨)이다. 군기 강화를 목적으로 해이한 병사를 체벌하는 음성적 관례법 ‘코드 레드’가 용인되고 있었다. 살해당한 사병은 내부의 적으로 응징된 것이다.

<어 퓨 굿맨>의 절정은 제섭 대령과 군법무관 캐피 중위(톰 크루즈)와의 법정 설전 시퀀스다. 셰익스피어가 시나리오를 쓴다면 <어 퓨 굿맨> 원작자인 소킨처럼 쓸 것 같다. 무엄한 비유라면 적어도 소킨은 셰익스피어 수준에 근접했거나 모방에 성공했다. 정밀히 구축된 갈등이 아슬하게 비등점을 향하고, 인물의 내면을 칼날 같은 대사로 시각화한다. 펀치라인의 빈도는 잦고 울림은 둔중하다.

제섭 대령은 베테랑 장교의 위엄으로 법정을 압도한다. 불굴의 상무정신과 불타는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애송이 중위 등 재판장에 모인 군인들을 훈도한다. 대령은 법무관 캐피에게 목숨을 맡기거나 맡은 적이 있냐고 묻고는 해병대는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국민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타이른다. 최전방의 긴장을 감내하는 자신 같은 군인이 있어 너희들이 단잠을 이룬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물러가라 명령한다. 제섭의 서슬에 잠시 주눅이 들었던 법무관 캐피는 용기를 내 진실을 요구하지만 제섭은 “너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라 포효한다.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급 병사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지휘관의 통절한 웅변. 대령이 펼치는 논리와 절규에 잠시 설득된다. 삼엄한 전방 기지에서 미 해병대가 원한 ‘굿맨(정예 군인)’은 제섭 대령일지도 모르겠다. 소킨은 ‘굿맨’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본분에 철저히 복무하는 자,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감당해내는 자가 정예 군인이고, 다행히 ‘몇명은 있다’는 긍정이 영화의 주제다.

귀신 대신 생사람 잡는 해병대라는 불명예로부터 해병대를 지키려는 박정훈 대령. 이 정예 해병이 외압을 견디고 끝까지 진실을 감당해주기를 바란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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