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일자리의 기본, 괜찮은 노동시간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지난 11일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국제공인학술지인 ‘직업환경의학’(AOEM)에 “노동자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으로서의 노동시간”이라는 제목의 특별호를 발표했다. 지난 3월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 방안’에 반대하는 입장문을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엔 노동자 건강의 측면에서 노동시간 문제를 살펴보는 논문들을 묶어 특별호를 낸 것이다.
특별호에서 저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뇌심혈관계질환, 정신질환, 사고 등 건강 문제의 관련성 연구 결과들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건강 중심 정책(Health in All Policies)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계층별로 노동시간 격차가 존재하고 일부 교대근무자의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노동시간 격차 해소, 야간노동 규제,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저임금 구조의 해결이 노동시간 유연화보다 정책적 우선순위가 앞선다고 밝혔다. 그리고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노동시간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려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대한의학회 산하 학회로서, 의대 학생들에게 직업환경의학을 교육하고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수련과 자격을 관리하는 유일한 학술단체인 대한직업환경의학회가 이런 민감한 정책적 사안에 공개적 행보를 보이는 것은 의사들로 구성된 학회라는 점에서 생경할 수 있다. 그러나 괜찮은 노동시간이라는 국제적 논의의 틀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 노동시간에 관한 국제적 논의에서 가장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사안으로 노동자 건강에의 영향이 손꼽히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1999년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 개념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2004년 괜찮은 노동시간(Decent working time)을 제시하였고, 이후로도 지속해서 일·생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시간에 관해 꾸준히 논의하고 있다. 괜찮은 노동시간은 ①건강하고 ②가정친화적이며 ③젠더 평등을 고려해야 하고 ④생산적이어야 하며 ⑤노동자가 선택하고 영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건강’은 단순히 진단과 치료 같은 의학의 전통적 틀에서의 조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하는 시간은 물론 배치, 업무 밀도, 일·생활 양립을 위한 자율성 확보, 휴게시간 부여 등 노동시간에 관한 직접적 조치와 그 결정에 있어서 노동자 참여 보장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노동시간으로 인한 건강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일부 노동자를 찾아내어 조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시간 관련 기본적 정책이 노동자의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미리 확인하고 건강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가 지난 3월 “사업주가 원하는 시기에 장시간 일을 하고, 역시 사업주가 원하는 시기에 쉬게 되어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휴식시간 결정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특정 시기에 급격한 노동시간 증가 및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여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 방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갈수록 격화하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하여 또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계절적으로 수요 변동이 심해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해야 하는 사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어려움이 있는 사업장의 문제와 특성을 살피고 이에 적합한 정책을 내놓아야지, 일부 사업장의 어려움을 해소하겠다며 전체 제도를 흔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여전히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시간의 제한이 없고, 법정 연차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주 상황에 따라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하도록 하면, 일용직이나 단기계약직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차라리 장시간 일하되 상대적으로 임금을 더 받는 사업장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 개인의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가능한 조치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국제노동기구는 2022년 110차 총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노동기본권으로 채택하였다. 노동정책에서 건강을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요소라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도 노동자의 건강을 중심에 둔 노동정책이 필요하다. 일부의 문제를 가지고 몸통을 흔들려는 시도가 노동시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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