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가해자가 사이비 종교에서 ‘용서’받겠다고?···‘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나도 어릴 때 아웃사이더 정체성”
여름 성수기 극장가를 장식한 ‘반듯한’ 블록버스터 영화들 가운데 어딘가 ‘삐딱한 기운’을 풍기는 포스터가 하나 있다. 폐업한 목욕탕에 두 10대 소녀가 아무렇게 서 있거나 앉아 있고, 포스터 한가운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천국? 필요 없는데요?”
활활 타오르는 듯 새빨간 글씨로 휘갈겨진 영화의 제목은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41)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뮌헨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평단의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이 지난 16일 개봉했다.
개봉을 닷새 앞둔 지난 11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임 감독은 기분 좋은 긴장 상태였다. “시나리오 구상 단계부터 개봉까지 오래 걸렸어요. 관객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가 ‘어떡하지’ 하다가 일희일비,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기분입니다(웃음).”
<지옥만세>는 따돌림과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가 수학여행 당일 자살을 계획했다 실패하면서 시작된다. 세상에 미련 한 톨 없는 이들은 괴롭힘 가해자이자 서울로 이사간 채린(정이주)이 곧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짝거리는 채린의 인생에 ‘기스’를 내기로 결의한 두 사람은 서울로 떠나고, 한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그를 만난다. 그런데 채린은 너무나도 선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반긴다. “너네 나 벌 주러 온 거지? 그거 나한텐 기적이고 축복이야.”
영화는 학교폭력과 사이비 종교라는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다룬다. 시나리오 작업 당시 걱정 섞인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간 흔하게 다뤄진 소재를 새롭게 다루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임 감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외톨이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학교와 종교 집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학교와 종교 집단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재생산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불안해하는 인간의 불안함이 어디로 날아가 어떻게 꽂히는가’에 대한 감독의 깊은 관심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임 감독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고립의 시간’이 영화에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거짓말>(2009), <더도 말고 덜도 말고>(2013) 등 단편으로 주목받은 그는 장편 영화 데뷔까지 오랜 시간을 홀로 보냈다.
“영화를 준비하며 고립된 생활을 많이 했어요. 홀로 시나리오 쓰는 시간들이 길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이 강했거든요. ‘주류의 삶에서 빗겨난 고독한 사람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를 스스로 질문한 결과 나온 답이 <지옥만세>입니다.”
전복의 에너지를 품은 제목 ‘지옥만세’는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외친 구호에서 가져왔다. 임 감독은 “지옥 같은 삶이지만, 죽음을 하루라도 미뤄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고, 삶을 예찬하지 않으면서도 용기를 주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효천 선교회’는 감독이 취재한 여러 사이비 종교 단체의 모습을 섞어 만들었다. 봉사, 회개 등을 통해 점수를 쌓고 이 경쟁에서 이긴 신도를 ‘낙원’으로 보내주는 극중 설정 또한 실제 사건에서 따왔다. 2000년대 이후 일부 사이비 종교단체들은 남태평양의 섬을 근거지로 삼아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켰는데, 현지에서 새로운 착취 대상을 찾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지옥만세> 속 생생하게 그려진 2020년대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에는 감독의 경험이 반영됐다. 임 감독은 과거 경기도의 한 예고 영화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생동감 넘치는 18세들과 생활하며 그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가 어릴 때보다 더 팍팍한 가치관 안에서 견뎌야 하는 것 같아요. 서로 혐오해야 하는 일도 많이 생겼고, 개인으로 존재하기보다 무리에 껴야 생존이 가능하고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위로할 방법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예상을 빗나가는 독특한 결말 역시 이 세대에 대한 감독의 선물에 가깝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나미와 선우 두 사람은 둘만의 축제를 즐긴다.
<지옥만세>를 통해 조금은 ‘삐딱한’ 데뷔를 한 임 감독의 다음 작품은 무엇일까. 현재 차기작을 위해 자료 조사 중이라고 밝힌 그는 말했다.
“아무래도 외톨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는 없겠죠. 결국 관심이 가는 것은 집단에서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존재들이에요. 보편적인 코드로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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