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화 폭락에 조급한 푸틴 …"수출기업, 달러 팔아라"

김상준 기자(kim.sangjun@mk.co.kr) 2023. 8. 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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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통제 꺼낸 러시아
기준금리 3.5%P 인상에도
통화 가치 폭락세 못 막자
자국기업에 외화 환전 명령
해외배당·대출연장도 금지
불응 땐 정부 보조금 제외

러시아 중앙은행(BOR)의 파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에도 루블화 가치 폭락세가 멈추지 않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긴급회의를 주재하며 자본 통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자국 수출 기업이 보유한 달러화 등 외화를 루블화로 강제 환전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8개월째 이어지면서 러시아 통화의 위기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긴급회의를 열고 러시아 재무부에서 자본 통제 방안을 보고받았다고 보도했다. BOR이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한 번에 3.5%포인트 인상한 다음 날이었다. 18일까지 루블화 가치 하락세가 진정되지 않으면 러시아 재무부는 자국 기업을 만나 자본 통제 계획을 공식화할 예정이다.

16일 로이터통신은 러시아 내부 논의에 정통한 관계자 5명의 발언을 인용해 "러시아 재무부가 자국 수출 기업에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 일부를 루블화로 환전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러시아 수출 기업은 앞으로 90일 이내에 외화 수익의 80%를 팔고 루블화를 사야 한다. 이에 불응하는 기업은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또 러시아 재무부는 자국 기업의 해외 투자자 등에 대한 배당과 해외 대출 연장 행위를 금지한다. 러시아가 우호적이라고 간주하는 국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울러 재무부는 기업들에 대한 수입 보조금을 취소하고 통화스왑을 제한한다. 자국 수출 기업이 러시아 은행 등에서 인출할 수 있는 외화 규모도 줄이기로 했다.

러시아 기업이 달러 등 외화를 루블화로 바꾸면 상대적으로 외화 공급이 증가하고 루블화 수요가 늘어나 루블화 가치가 덜 하락한다. 해외 배당과 해외 대출 연장 금지 조치 등도 외화 유출을 줄여 외화 공급을 늘리는 방안이다. 달러 유출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고육지책인 셈이다.

푸틴 대통령이 자본 통제 카드를 꺼내 든 건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이후 약 1년6개월 만이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국가의 제재가 공식화된 지난해 3월 루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120루블로 추락하자 당시 러시아 정부는 자국 에너지 기업의 루블화 보유 의무화, 시민 개인에 대한 달러 환전 금지 조치 등으로 50루블대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올해 들어 루블화 가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지난 6월 1일 달러당 81루블에서 지난 15일 달러당 100루블로 약 3개월 만에 18% 이상 미끄러졌다. 올해 들어 하락률은 30%를 넘는다. 러시아 경제의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지는 '달러당 100루블' 선이 무너진 건 지난해 3월 이후 처음이다. 이에 BOR은 예정에 없던 통화정책회의를 긴급 소집해 기준금리를 8.5%에서 12%로 3.5%포인트 올리는 초강수를 뒀다. 러시아 정부는 수출 감소 등 교역 조건이 악화한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러시아가 올해 1~7월 무역을 통해 올린 수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5% 감소했다. 서방의 제재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는 "루블화 가치가 하락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석유·석유제품 수입 중단과 주요 7개국의 석유 가격 상한선 부과 등에 따른 석유·가스 등 에너지 수출 수익 감소"라고 전했다. 지난 1년여 동안 서방국가는 러시아를 우회한 에너지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에너지 산업은 러시아의 주력 분야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재정 적자 급증도 루블화 약세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FT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비 지출이 증가하고 수출 수익이 감소했으며 수입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졌다"면서 "자본 통제 정책은 전쟁이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크렘린궁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올해 총예산 가운데 약 3분의 1인 1000억달러(약 134조원)를 국방비로 지출할 예정이다. 이는 지난해 대비 2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루블화 가치 하락은 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금융시장에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러시아의 최근 3개월간 물가 상승률은 7.6%로, 정부 관리 목표인 4%의 2배에 가깝다. 러시아 증시의 대표 지수인 MOEX는 지난 16일 기준 3049.46으로, 11일(3155.51) 대비 3.36% 내려갔다. 블룸버그는 "크렘린궁은 서방의 제재가 효과가 없다고 자랑해 왔지만, 이번 루블화 가치 급락은 러시아 측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김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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