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미국의 분노
지금 中이 美 분노에 혼나는 중
대미 최대 흑자국이 된 한국
상대 자극하지 않는 지혜 필요
1300원쯤 되는 원·달러 환율이 반 토막(700원)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은 환호할 일이다. 수입물가의 비중이 31%인 만큼 2.7%인 물가상승률이 1%대로 낮아질 것이다. 해외 관광이 편해지고 유학생 학비 걱정도 크게 덜 것이다.
경제 전체로는 저주다. 가격 경쟁력이 낮아져 수출이 급감할 것이다. 가계와 기업은 물가가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소비와 투자를 미룰 것이다. 성장 활력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이것은 40여 년 전 일본에서 실제 발생했던 일이다. 미국은 1985년 9월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4개국과 공조해 엔화 가치를 1달러당 237엔에서 하루아침에 128엔까지 약 2배 절상시켰다(소위 '플라자 협정'이다). 경기 침체를 우려해 금리를 대폭 인하하자 시중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으로 몰려 버블이 생겼고, 오래지 않아 붕괴됐다. 일본은 그로부터 30년 이상 비틀거렸다.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출을 필두로 소비와 투자도 줄어드는 장기 침체를 경험했다. 기준금리를 0%대로 낮추고 정부가 돈을 쏟아부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일본이 최근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엔저 덕분이다. 엔화가 1달러당 134엔에서 150엔으로 약 10% 이상 절하되면서 수출이 늘고 외국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소비 회복으로 성장 전망도 밝아졌다. 증시도 33년 이래 최고다. 엔저의 이면에 미국의 양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국은 미·일 간 무역 불균형을 내세워 플라자 합의를 주도했지만, 속내는 일본이 지나치게 잘나갔기 때문이다. 일본은 경제력이 급속히 신장하면서 1968년 세계 2위가 되었고, 곧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설렘과 희망 섞인 기대가 만발했다. 바로 그때, 미국이 초강수 견제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지금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플라자 합의의 시즌2이다. 엔화와 달리 위안화는 국제화가 돼 있지 않아 환율 절상 대신 관세, 수출 금지 등 무역 수단을 동원한 것뿐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더니, 전체주의적 통치를 가속화하면서 2049년 미국을 제치고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는 '중국몽'으로 미국을 자극한 것도 닮은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수출품에 대해 무차별적인 관세를 부과했다. '화웨이'를 제재하고 미국 회계 기준을 따르지 않는 중국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폐지를 추진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견제는 훨씬 강력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네덜란드, 일본 등 주요 반도체 기술 국가에 대중국 수출 제한을 요구했다. 미국 기업의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에서 중국 투자도 막는다. 그 결과 일본이 겪었던 어려움이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리오프닝을 했음에도 수출과 외국인 직접투자가 위축되면서 생산자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지속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공포에 빠져 있다. 청년실업률도 20% 이상 급등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위상이나 국익에 도전하는 나라를 용인한 적이 없다. 철저히 견제했고 상대방은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왔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대규모 무역흑자를 누리자 대대적인 시장 개방 압력을 가했던 것이 좋은 예다. 미국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하는 것은 미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의 숙명이다. 중국의 부진으로 대미 흑자가 1위가 되는 지금 경계 수위를 높여야 한다. 정부가 이를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정책은 금물이다.
미국의 이해와 공감을 끌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 이후 많은 돈을 들여 워싱턴의 싱크탱크나 국제기구를 지원해왔다. 우호 세력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다. 경제 규모나 국력으로 보면 이제 우리도 일본을 참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최광해 칼럼니스트·전 국제통화기금 대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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