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채권 없애려던 정부, 법원에 "사과 강요할 수 없어"…일본 기업 입장 대변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획득한 법적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정부가 진행한 변제공탁이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린 가운데, 정부는 일본 기업의 사과는 강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법원에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사실상 일본 기업의 입장을 대변한 셈이다.
17일 광주지방법원에 따르면 전날 민사44단독 강애란 판사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의 공탁 불수리 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7월 3일 재단은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정부의 변제안을 수용하지 않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상대로 변제공탁 절차를 개시했다. 공탁은 채권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수령하지 않을 경우 채무의 대상인 목적물을 관할 공탁소에 맡겨 채무를 면제받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 3월 6일 발표한 해법안을 통해 일본 기업의 참여가 전혀 없는 기금을 마련하고 일본 기업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이 기금에서 재단을 통해 지급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에 대상자 15명 중 2명의 피해자와 2명의 피해자 유족이 정부 해법에 반발해 재단이 지급할 금액을 수령하지 않았고, 이후 재단은 이들을 상대로 이 금액을 찾아가라는 변제공탁을 실행했다.
정부는 변제 공탁을 실행하는 것 자체로 피해자들의 채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변제공탁의 목적 자체가 공탁을 진행하여 채무자의 채무를 없애는, 즉 채권자 입장에서는 채무자에 대한 채권을 없애는 것이다.
이렇듯 공탁을 통해서라도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자의 채권을 없애고 싶었던 정부의 계획은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광주지법은 지난 7월 4일 재단의 공탁이 유효하지 않다며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당시 공탁관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피해자인 원고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기업이 아닌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증명을 이미 지난 3월 재단 측에 제출했는데, 이를 '공탁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후 재단은 이의신청을 하며 본격적인 재판을 진행했으나 이 역시 기각됐다.
재단의 이의신청을 기각한 강애란 판사는 판결문에서 법원 공탁관의 불수리 결정이 "형식적 심사 범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없고, 피공탁인(피해자)의 (제3자 변제에 대한) 반대의사가 분명한 상황에서 민법 제469조 1항을 근거로 불수리한 것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민법 제469조 1항에는 "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며 채권자가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 제3자의 변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강 판사는 "더구나 이 사건 판결금은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의 피해자에 대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채권(위자료청구권)"이라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은 가해행위를 한 자가 피해자에게 발생한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그 채무의 내용에 따른 이행"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위자료는 정신적 손해라는 비재산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으로서 정신적 손해의 전보적 성격뿐만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제재적 기능, 금전적인 만족 이외에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받은 인격적 모욕 등 불법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피해자를 심리적 감정적으로 만족시키는 기능도 있다"며 제3자 변제가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강 판사는 "(일본) 가해기업이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채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청인이 제3자 변제를 통하여 이 사건 판결금을 변제한 이후 가해기업에 구상권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가해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여 채권자로서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채권의 만족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 판결금이 결과적으로는 금전채권으로서 제3자 변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채권자의 반대 의사표시가 명백하다면 제3자 변제를 제한하는 것이 손해배상 제도의 취지 및 위자료의 제재적, 만족적 기능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강 판사는 "따라서 이 사건 판결금에 관하여 채권자의 제3자 변제에 관한 반대의사가 명백하므로, 신청인은 민법 제469조 제1항 단서 후단에 의하여 채권자에게 이 사건 판결금을 변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정부는 법원의 결정에 항고할 뜻임을 밝혔다. 17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정부는 이번 강제징용 해법 취지에 따라 피해자의 원활한 피해 회복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법적 절차 통해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계속 구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법원의 공탁 불수리에 대한 이의신청서에 일본 정부의 사과를 강요할 수 없으며, 공탁을 수리하지 않을 경우 국익에 반한다는 논리를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신문>은 재단이 강제동원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에 대한 공탁 불수리 결정 이의신청서에서 피해자들이 요구해 온 일본 정부의 사과에 대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어느 누구도 사과를 강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재단은 "채권자 일방의 의사로 부당하게 채무자(일본 가해기업)에 의한 변제만을 강요하는 부당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채무자(일본 가해기업)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든지, 판결금을 채무자로부터만 받아야 한다는 건 법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며 대법원의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어 "공탁공무원의 (공탁 불수리) 판단으로 우리 정부의 강제징용 문제 해법이 무용지물이 되는 결과가 되는 것은 국익에도 현저히 반한다"며 정부의 해법을 수용하는 것이 국익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재단은 "채무자 본인이 직접 변제하는 경우나 제3자(재단)가 변제하는 경우나, 채권자가 동일하게 금전 채권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채권의 역사성과 의미를 무시하는 듯한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와 관련 지난 3월 6일 원고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피해자가 (대법원으로부터 판결받은) 위자료의 의미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돈으로나마 위로한다는 의미다. 이를 누구나 돈을 줘도 괜찮은 채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견해를 밝힌 바 있고 광주지법 역시 판결문에서 이같은 인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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