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100년만에 공개되는 사망자조사표… 조선인 피해 연구는 ‘난망’

박용하 기자 2023. 8. 1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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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모임 독립 관계자들이 지난 1일 서울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간토 학살 진상 공개와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도쿄도가 극히 일부만 공개했던 5만장 분량의 간토(관동)대지진 ‘사망자조사표’가 사태 100주년을 맞아 연구자들에게 공개될 전망이다. 하지만 피해자 이름은 공개하지 않아 조선인 희생자 규모와 인적 사항을 밝히기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도쿄도는 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도하는 행사에 또다시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등 반성없는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 지지통신은 17일 학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간토대지진 사망자조사표를 관리해오던 단체들이 지진 100주년을 계기로 올해 안에 이를 모두 데이터화하고, 연구 목적에 한해 열람을 허용키로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자료가 공개되면) 이재민 개개인의 동향을 검증할 수 있어 관련 분석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환영했다.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 일본 간토지방에서 발생한 규모 7.9의 강진으로, 약 10만500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 정권은 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본에 거주 중인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그 결과 6000~1만여명의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했다.

1923년 9월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발생한 간토대지진으로 파괴된 마을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지진 후 일본 당국은 피해자 유족들이 관공서에 제출한 서류를 토대로 성명과 주소, 생년월일, 사망장소, 본적 등이 기록된 조사표를 만들어 관리해왔다. 이 조사표는 총 5만장 가량이지만, 중복 정보를 제외하면 약 3만8826명의 희생자 정보가 기재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대지진뿐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 피해자의 이름도 일부 포함돼 있다.

앞서 기타하라 이토코 리쓰메이칸대 객원연구원이 2011년 처음으로 이 조사표 중 일부(4300여장)를 열람해 보고서를 발표한 후 간토대지진 희생자에 대한 민간 차원의 후속 연구가 이어져왔다. 다카노 히로야스 오타루상과대 교수와 니시자키 마사오 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 오충공 다큐멘터리 감독 등은 2016년 이 자료들을 통해 71명의 조선인 피해자 명단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 중에는 1950년대 한국 정부가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자로 공식 확인한 박덕수, 박명수, 조묘송씨 등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박경국 전 국가기록원장이 2013년 11월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간토 대지진 피살자 명부 공개에 앞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하지만 이번 공개에선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피해자들의 이름이 제외될 방침이라, 조선인 피해와 관련된 추가 연구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부터 연구가 시작됐음에도 조사표 전문이 공개되지 못한 것은 도쿄도의 폐쇄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기타하라 연구원이 처음 자료 일부를 확보할 때도 반년에 걸친 설득이 필요했으며, 추가적인 공개를 요구했을 때는 도쿄도 측이 더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도 측은 그간 대지진 기록에 대한 일본사회 내부적 논란이나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도쿄도는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반성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는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행사에 2017년부터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으며, 지진 100주년을 맞은 올해도 동일한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간토대지진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위한 개별 행사에는 따로 추도문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다.

앞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실행위원회’는 지진 100주년을 맞아 특별히 고이케 지사에게 추도문 송부를 요청했으나, 이같은 당부는 허사가 됐다.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진도 7.8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5분여 동안 비슷한 규모의 여진이 두 차례 더 일어났고, 간토지방은 대혼란에 빠졌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던 많은 가정집과 음식점 등에서 화재가 발생해 도심 목조가옥 밀집지역을 모두 태웠다. 요코하마는 도시 전체가 괴멸했다. 사망 9만9331명, 행방불명 4만3476명, 이재민 340만명, 가옥 전소 44만7128채, 전파 12만8266채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14억7000만엔)의 4배가량인 55억~65억엔으로 추정됐다.

지진 직후 출범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지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재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됐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정부가 공작대를 조직해 이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일본 전역에서 3700여개의 일본인 자경단이 조직돼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로 무장한 자경단은 검문검색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어려운 일본 발음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죽이기도 했는데, 중국인은 물론, 도호쿠, 홋카이도 등 다른 지역 출신 일본인들도 함께 피해를 입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로 피신했지만 자경단은 경찰서까지 쳐들어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이를 모른 척했다. 오히려 야쿠자가 자신들의 조직원인 조선인을 보호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일본의 보수적인 통계에 의해서도 2500명이 넘는데, 실제로는 6000~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자경단 일부를 연행해 조사했으나 극히 소수만 기소했으며, 이들도 대부분 증거 불충분 등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20년대 초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로 노동운동, 농민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강하게 대두됐다. 또 조선과 대만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면서 우익과 군부가 긴장하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간토대지진은 일본 우익과 군부가 그동안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회주의 세력과 조선인들을 제거하고 일본의 민심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간토대학살의 와중에 일본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6살짜리 조카, 사회주의자인 아내 등이 군경에 의해 구타당해 죽는 등 많은 일본 사회주의자들도 학살됐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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