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난다, 화가 나”…‘분노’를 드라마로 만드니 생긴 일?!

2023. 8. 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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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노동자인 대니 조로 분한 스티븐 연.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이유도 없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화를 안내면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으로 여기는지, 사소한 일에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타인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쌓인 마음 속의 화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칼부림으로 푸는, 일명 ‘묻지마 살인’은 더 이상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화로 가득찬 ‘앵그리 소사이어티(Angry Society, 화난 사회)’ 현상은 우리가 보고 듣는 콘텐츠에도 반영되고 있다. ‘맨 인 블랙박스’와 ‘한문철의 블랙박스’ 등에선 운전 중 사소한 일로 충돌한 후 묘기에 가까운 보복운전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경규와 박명수 등 버럭 MC들이 화풀이 노하우를 방출하는 ‘나는 지금 화가 나있어’라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왔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에서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재미교포 이성진 감독(41)이 일상적인 분노를 소재로 만든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원제 BEEP)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스티브 연, 앨리 윙, 죠셉 리, 데이비드 최, 영 마지노, 에쉴리 박, 저스틴 민 등 한국과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들이 주축인 이 드라마는 오는 9월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무려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아시아계 이야기의 드라마가 에미상 후보에 대거 오른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성난 사람들’은 돈을 벌어 한국에 있는 부모를 모셔와야 하지만 사업이 잘 안풀리는 한국계 노동자(도급업자)인 대니 조(스티븐 연 분)가 마트에서 차를 후진하자 강한 크락션을 울리며 손가락 욕까지 하는 흰색 벤츠 SUV(스포츠유틸리티차) 운전자인 중국계 이민자 에이미(앨리 웡 분)와 시비가 붙어 도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로드 레이지(Road Rage, 도로 위의 분노)’다.

사실 이 시리즈의 장르가 코미디어서 코믹한 이야기로 가볍게 즐기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묵직한 이야기들이 속속 등장한다. 한국계 미국인이 이주민으로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들의 미국 사회 적응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성진 감독.

‘성난 사람들’의 각본·연출을 담당한 이성진 감독(41)은 최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3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의 특별세션 ‘‘성난 사람들’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에이터-글로벌 콘텐츠 시장속 아시아계 창작자들’에 참가한 후 기자들과 만나 “‘성난 사람들’은 몇 년 전 내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며 “신호대기 중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 걸 알아채지 못하자 뒤에 있던 백인 차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고 난폭운전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 기간에 ‘로드 레이지’가 무려 34% 늘어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말도 안되는 분노를 쏟아내는 비디오들도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라며 “분노는 항상 있지만 팬데믹 때 더 많이 나왔고, 우리의 작업 방향이 옳다는 확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감정은 세계 어디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며 “분노를 계속 쌓아두기만 하고, 아무런 이해나 공감 없이 분노라는 감정을 표출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좀 더 연결(상호작용)하는 데 포커스를 맞춘다면 분노의 감정이 수그러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하지만 “이 시리즈로 사회적 의미나 시사점을 던지려는 의도는 없다”면서도 “이 스토리를 사회가 보게되고, 사회가 의미부여와 해석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시리즈를 통해)아시아의 정체성 문제와 이민족 간 화합 가능 여부 등의 문제를 언론들이 다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난 사람들’에는 한국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다. 주인공 대니의 대사 중에도 “김치찌개 끓여놓고 기다리는 한국 여자를 만나”’와 같은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반영됐다”며 “그 대사도 (한인) 교회 친구나 친구의 삼촌 등으로부터 들어 탄생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의 한 장면.

그는 에이상 후보에 오른 것에 대해선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며 “아시아 배우와 크리에이터 팀이 만든 드라마가 에미상 후보에 올랐으니 10년 후에는 얼마나 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올 지를 생각하면 신난다”고 말했다. 시즌2 계획에 대해선 “만약 분노에 대해 추가적으로 만든다면, ‘성난 사람들’을 통해 하고 싶다”며 “시즌마다 새로운 ‘비프’, 새로운 종류의 ‘분노’를 만들어 분노 시리즈로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아직 시즌2 제작은 결정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작가 조합 파업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방인이 창작자로서 자리잡는 데 어려움이 없었냐는 질문에는 “친구가 없어 TV만 봤다. TV가 내 친구였던 셈”이라며 “이민 이후에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적응이 힘들다 보니 TV를 가까이 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TV 속 인물과 스토리 속에서는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심지어 자유롭다고 느꼈다”며 “이런 것들을 창작하는 작가가 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서 코미디는 스토리텔링의 중심축을 이룬다. 그는 “코미디를 빼면 시청자가 줄고, 과도하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며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면 웃었다가 울었다가 겁에 질렸다가 여러 감정을 겪게 되지 않나”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미국도 요즘은 장르를 섞기도 하지만 드라마면 드라마, 코미디면 코미디였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에 오니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라며 “어릴 때 먹던 음식을 먹으면서 그 기분이 살아났다. 한국 땅에 온 것 자체가 행복”이라며 웃었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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