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킴, '뿌윰한 희망' 들려주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순진무구한 희망은 미학적으로 거덜나기 쉽다.
싱어송라이터 퓨어킴의 '뿌윰한 희망'이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꾸준히 입소문을 타고 있는 그녀의 정규 2집 '미안한데 축하해'는 노래가 '온전한 희망을 줄 수 없다'는 걸 발설한다. 대신 세계의 고통 앞에서 듣는 이들과 함께 힘을 다해 같이 아파한다.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부질 없이 절망해서 아름답다.
정규 음반으로 따지면, 정규 1집 '이응'(2012) 이후 무려 11년 만. 흘려 들을 트랙이 없는 10곡으로 꽉꽉 채운 이번 음반은 그 기다림을 충분히 보상한다.
애써 성숙한 티를 내지 않아도 통찰력의 깊이를 충분히 체감할 수 있는 체험형 음반. 영감에 넘치는 나른한 보컬의 주술성과 노랫말·선율의 뭉근한 몽환성은 예나 지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10년대 초반에 벼락 같이 등장해서 나릿한 음악 신(scene)에 전율을 안겼던 퓨어 킴이다. 다음은 그녀와 나눈 일문일답.
-2020년에 낸 EP '블루튜브(Bluetube) 2020' 이후 새 앨범은 3년 만이지만, 정규로 따지면 약 11년 만입니다. 정규 음반 발매가 왜 이렇게 늦어진 겁니까?
"준비하던 앨범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엎었습니다. 그 앨범에서 '말해 뭐해'만 남겨두고 새로 작업한 앨범이 '미안한데 축하해'입니다. 어떻게 보면 앨범을 2개 준비 했던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미안한데 축하해 앨범의 작사, 작곡을 마친 후 마음에 맞는 편곡자를 찾고 구체화 시키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작업 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이번 정규 음반은 오래도록 기다린 팬들의 그리움을 충분히 보상해주는 음반입니다. 어떤 것이 모티브가 돼 시작한 앨범인가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십 년 이상 음악을 통해 그때 그때의 자신을 표현하는데 집중해 왔습니다. 이번 앨범은 제 음악의 청자를 생각하면서 만든 첫 번째 앨범 입니다. 듣는 이가 자기 버전의 기쁨을 느끼기를 소망하며 작업했습니다."
-아울러 '미안한데 축하해'라는 음반 제목이 아이러니합니다. 제목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아울러 수록곡 제목들도 묘한 대구를 이루는 게 많아요. 일부러 의도한 것들이 있습니까?
"존재의 탄생은 그 자체로 당연히 축하 받아야 합니다. 탄생 후 따라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 합니다. 그래서 축하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겁니다. 수록 곡 제목들로 대구를 의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상어를 사용하되 아이러니를 더하려고 하기는 했습니다."
-앨범 수록곡들이 다 좋아서 트랙 하나 하나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안 괜찮아'는 '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조금씩 괜찮아졌다'는 트랙 소개글이 참 와 닿았습니다. 저도 그런 상황들이 있었거든요. 그럼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나서는 더 괜찮아지셨는지요. 성가와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사운드는 어떻게 해서 고안이 된 건가요?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조금씩 나아진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에 대한 방증은 몇 십 년간 지속돼온 만성적 우울증을 인정하고 진단 받은 후 치료를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웃음) 성가와 종소리는 편곡을 맡아 준 이대봉 프로듀서의 아이디어입니다."
-'생일' 트랙도 참 좋았습니다. 퓨어킴 씨에게 생일이란 무엇인가요? 라틴 코드에 한국적인 사운드를 더한 건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가요?
"생일은 내가 아니라 남이 만들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것도 저의 계획과 의지대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고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축하를 받는 것도 제 의도나 기대가 아닙니다. 앨범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심수봉 선생님의 초기 작업 같은 분위기를 상상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오마주입니다."
-'포기가 익숙한 사람'은 라틴 코드가 다르게 사용됐습니다. 기타가 중심이 되는 곡인데, 어떤 효과를 기대했습니까?
"군더더기를 자제하고 중심 위주로 작업 하려고 했는데 표현이 잘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공력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당연한 적 없어'는 몽롱한 처연함이 인상적인 곡이에요. 이 곡을 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분위기는 무엇입니까? '여름이었던 만큼 겨울이지만 겨울인 만큼 여름'이라는 트랙 설명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절대적인 것일수록 당연시 하는 게 인간성이지 않나 싶습니다. 예민하게 깨닫고 대처 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계속 되뇌이는 중입니다. 여름과 겨울로 표현한 온도의 대척점은 방향만 다르지 치열하다는 지점에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더운 것도 너무 추운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잖아요."
-'틀려도 내가 틀려'는 노랫말도 곡의 분위기도 주체성이 느껴져 좋았습니다. 이 노래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살아가면서 진짜 중요한 것들은 타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후회가 막심합니다. 저는 남 탓을 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메타 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선택한 후 후회하는 것도 특권이라고 봅니다. 틀려도 내가 선택해서 틀렸다는 것을 아는 것은 행운입니다."
-'언제든 어디든'의 핵심 악기는 베이스인데요, 이 곡에서 베이스가 주인공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목소리와의 긴장감도 아슬아슬합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시작해 통합적 이미지로 마무리 되는 곡입니다. 부를 때마다 안정감을 느낍니다. 시작은 불안하나 끝은 부드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내가 모를까'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트랙 중 하나입니다. 아련하고 애틋한 정서가 곡을 지배하는데 사운드 측면에서 가장 신경 쓴 지점은 무엇입니까? 노랫말은 '합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나요?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통했다니 기쁩니다. 음악과 청자들과의 연결성을 위해 커다란 공연장에서 부르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기타나 건반만 가지고 심플하게 부르는 버전도 좋아합니다. 그럴 때는 관계에 대한 감사를 속삭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나를 알아주는 네가 있고 너를 알아주는 내가 있으니 우리는 괜찮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때도 누군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 좋으라고'는 1분40초가량의 짧은 트랙입니다. 이 곡의 포인트는 어떤 지점입니까? 짧은 트랙으로 만든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짧은 노래를 좋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긴 노래 보다 짧은 노래를 더 좋아합니다. 위로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꽃으로 위로를 대신합니다. 뿌리가 땅속에 있는 꽃이든 뿌리 없이 물병에 꽂혀있는 꽃이든 얼마 안 가 시드는 것을 봅니다. 시간의 흐름을 속절없이 보여주니 정신차리게 됩니다. 나아가게 합니다."
-'말해 뭐해'는 성수대교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곡을 통해서 어떤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까? 사운드는 아날로그성이 강한데 이런 효과로 어떤 걸 강조하고 싶었나요?
"엎은 10곡의 앨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미안한데 축하해 앨범의 가장 연장자 노래로 실리게 됐습니다. 우리는 나름의 크고 작은 참사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서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수대교 보다는 세월호를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아프고 까다로운 노래인데 어쿠스틱해서 침착해 보이지 않나 싶어요."
-'오히려 좋아'도 트랙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용서한 것보다 용서받은 게 많다는 걸 알게 돼 곤란해졌다'는 얘기. 이걸 어떻게 느꼈고 이걸 느낀 뒤에 음악적으로나 삶적으로나 바뀐 것이 있습니까?
"제가 용서한 것보다 용서 받은 게 많고 앞으로도 용서 받고 싶기 때문에 저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용서는 죄 지은 자에게 복수하려고 들지 않고 저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음악은 제 삶에 30% 정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의 주식으로 생각하면 많은 것 같고요. 사람 몸에 물이 70%라고 하는데 그 외라고 생각하면 애매하고요. 30점은 F 학점이기 때문에 망한 거 같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음악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삶에 적용해야 하는 부분이 훨씬 커서 음악적으로 뭐가 바뀌었는지 체감은 어렵네요."
-무엇보다 강력하지 않지만 뭉근한 삶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이번 음반은 퓨어킴 식 '뿌윰한 희망'이라고 정의하고 싶은데요. 저 역시 위로를 받았고요, 이번 음반을 작업하면서 퓨어킴 씨 스스로 위로를 받은 측면이 있다면요.
"뿌윰한 희망이라니 아름다운 표현 영광이에요. 제가 뭐라고 위로를 할까요? 꽃도 아닌데요. 그렇기에 더욱 고맙습니다. 제가 어딘가에서 위로 받았다는 답변이나 글을 썼었나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앨범 마스터 버전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기도 하고요. 위로 보다는 안심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끝마쳤다. 휴…"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은 이대봉 씨와 협업은 어땠습니까? 어떻게 이대봉 씨와 작업을 하게 된 건인가요?
"편곡자를 찾아 헤매다가 소개받았습니다. 첫 번째 미팅에서부터 같이 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평화롭고 여유롭게 작업 했습니다."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보컬의 색은 여전하지만 좀 더 덤덤해진 듯한 느낌도 듭니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신경을 쓴 보컬 색깔이 있다면요.
"저는 스스로에게 몽환적이거나 관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하겠죠?(웃음) 제 목소리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들으신 거니 그렇게 들리나 보지요. 저에게 제 목소리는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소리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보컬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 할 것 같진 않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요."
-벌써 데뷔하신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인디, 메이저 골고루 넘나들면서 활동을 하셨는데, 10년 전과 지금 퓨어킴 씨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 중에 가장 변화한 것이 있나요?
"예전에는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음악을 하겠다고 자신만만했지만 그것은 치기어린 발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웃음) 음악을 만들고 나누는 것은 저의 유일한 직업적 꿈입니다. 꿈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깨어나면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요. 깨기 전까지 사랑하며 꿔볼 생각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만족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퓨어킴 씨가 현재 '미안한데' 가장 축하하고 싶은 상황이 있다면요?
"어쩌다가 여기까지 인터뷰를 보고 있는 바로 당신의 지금 상황입니다."
-추가로 향후 알려주실 만한 일정이 있다면요. 다음 정규는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겠죠?
"미니 앨범과 정규 앨범을 동시에 구상 중입니다. 할 수 있을 때 까지 계속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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