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내가 찾아낸 74년 전 국가기록, 진실화해위는 왜 못 찾았나”
애초 기초조사 했으면 풀렸을 사건…재조사 요구하자 “불가”
74년 전인 1949년 11월, 서울 보성고 3학년 구자권(1931년생)이 집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3개월 뒤 보성전문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1년, 2년, 10년, 20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구자권은 올해 4월 자신을 끈질기게 찾으려 노력한 외조카 홍성수(76)씨 덕분에 존재가 드러났다. 홍씨는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정보공개청구로 외삼촌의 수형자 기록카드를 손에 쥐었다.
이 카드를 보면, 외삼촌 구자권은 1949년 11월 수형생활을 시작해 군법회의에서 이적죄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마포형무소에서 형을 살다 1971년 출소했다. 1979년 대공분실로부터 수배된 기록도 있다. 구속도, 출소도, 수배도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국가는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18살 청년을 군법회의에 넘겨 이적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집에도 연락하지 않은 채 20여년의 형을 살게 한 것이다. 74년간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사람은 사라지고 다양한 수형기록이 적힌 정부 공식문서만 발견된 셈이다.
홍씨는 일찍 사망한 줄 여겼던 외삼촌이 실종 74년 만에 돌아온 느낌마저 들어 감격했다. 홍씨는 2021년 1월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외삼촌과 관계된 사건의 진실규명을 신청해왔다. 홍씨는 외삼촌이 전쟁 중 학살당했다고 생각해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해달라는 신청과 함께 외삼촌의 본적지인 경기 남양주군 화도읍 마석우리 419번지에 살던 구씨 일가 12명이 미군한테 학살당했다는 또 다른 사건도 신청을 했다.
진실화해위는 홍씨의 두 가지 신청사건을 병합해 “조사대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각하했고, 이후 이의신청도 기각했다. 홍씨는 1년 뒤 다시 신청했지만 또 각하됐다. 문제는 외삼촌 구자권의 수형자기록 카드를 신청인 홍씨가 찾아내면서, 진실화해위가 사건 접수 뒤 최소한의 기본조사를 하지 않고 각하한 게 아니냐는 눈총을 받게 된 것이다.
홍씨는 14일 한겨레와 만나 “진실화해위가 사건을 신청받은 즉시 나라기록관에 한 번만 정보공개 신청을 했어도 처음부터 무난하게 조사 요건을 충족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수형자 기록카드가 나온 이후에도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홍씨는 올해 4월 수형자 기록카드를 찾은 뒤 진실화해위를 방문해 재조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 사무처 관계자는 “2022년 12월부로 2년간의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신청기간이 끝났고 이의신청까지 기각된 사안이라 안 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홍씨와 만났던 진실화해위 사무처 관계자는 1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소위와 전체위원회를 거쳐 각하가 결정된 사안이라 이후에는 행정소송으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안내해드렸다”고 말했다.
조사를 담당했던 부서의 간부는 사건 각하와 관련해 “2021년 1월 최초 신청했을 때는 사인(私人) 집단 간의 사건으로 판단했고, 2022년 미군 사건으로 신청을 했을 때는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봤다”며 “조사개시 단계에서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해 각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워낙 신청 사건이 많은 상태에서 개별 진실규명 대상자에 관해 기초조사를 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진실규명 신청서가 접수되면, 조사관은 나라기록관으로부터 진실규명 대상자에 관한 기본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신청인이 잘못 알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만 했을 뿐, 관련 기관에 자료요구를 전혀 하지 않고 각하처리 해버린 경우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규명 신청 기간에 신청을 했고, 진실화해위의 조사 소홀로 각하처리 한 사건이기에, 진실화해위가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지금이라도 조사개시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도 했다.
홍씨가 낸 진실규명 신청서엔 “구자권이 대전형무소에서 구속수감 중 사살되었다”거나 “가족들이 다른 문중 형제들의 모함 때문에 좌익으로 몰렸다”거나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신청과 각하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다른 자료를 찾으며 내용이 바뀌기도 했다.
사건 관계자가 대부분 숨진 상태에서 사건 당시엔 두세살에 불과했던 홍씨가 불완전한 전언에 의지한 터라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신청서에는 구자권이라는 인물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 건이 분명히 있고 국가기록원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대상자에 대한 국가기록만 조회했어도 초기 단계에서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진실화해위는 이와 관련 “홍씨 신청사건은 성격상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홍씨는 수형자 기록카드를 찾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했다. 경찰청,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 육군 검찰단, 육군기록정보관리단, 국민신문고, 국가기록원 서울기록관을 돌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성남의 나라기록관 문을 두드렸다. 홍씨는 “수사기록과 판결문 등을 찾아내고 외삼촌이 정말 형을 살고 출소를 한 것인지, 왜 투옥과 출소 사실을 가족들에게 왜 안 알렸는지, 혹시 형을 살다 공권력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지 진실규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씨는 외삼촌 구자권의 실종과 구씨 일가 12명 몰살 사건은 서로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다. 12명 일가 몰살 사건의 발단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외삼촌 구자권의 여동생 구자연(1934년생)의 이성교제였다. 남양주군 화도읍 마석우리 본가에 살던 구자연이 서울의 연희전문대를 다니며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던 남학생과 사귄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야단을 맞았는데, 이 소문이 동네에 새나가자 평소 이 집에 앙심을 품던 이웃 문중 형제들이 구씨 집안을 좌익으로 모함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들은 구자권이 마석으로 갔다는 것이다.
홍씨는 “이후 구자권의 친부모인 구상회 이정하를 비롯한 구씨 일가 12명이 다른 동네 사람들과 함께 미군에 의해 학살됐고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앞에서 밝혔듯,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관해 “미군에게 희생당했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기 전인 2005년 11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상임공동대표 이이화 김영훈)가 조사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에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그 내용이 담겨있다. “1950년 2월 어느 날 미군 30여명이 무장한 채 마을에 들어와 (86명의)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몇 시간 동안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미군이 누군가와 무선 연락을 한 뒤 구덩이를 파 주민들을 몰아넣은 뒤 총살했다.”
당시 구씨 일가의 집인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읍 마석우리 419번지에서 학살 현장으로 적시된 가곡리까지의 거리는 4㎞ 이내다. 다만 이 내용이 현장 답사와 관련자 증언 등 세밀한 조사와 사건의 개연성에 대한 검증을 거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기 진실화해위(2005~2010)도 이 사건을 조사하지는 않았다. 홍씨는 “1987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이 사건 현장의 목격자이며 어릴 때부터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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