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6. 호남성 풍수, 마오쩌둥, 펑더화이, 마리안

손건웅 2023. 8. 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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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선영
 

중국 근현대를 통하여 호남성이 배출한 독보적인 인물은 마오쩌둥이다. 필자는 2011년 5월과 2019년 10월 두 차례 마오의 선영을 간산했다. 2011년에는 방문객도 많지 않았고, 마오의 생가까지 택시로 접근할 수 있었다. 다시 가보니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마오가 즐겨 먹었던 홍샤오러우(紅燒肉). 전에 들렸던 그 맛집도 찾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 생가.

마오쩌둥 생가.
 

우중에도 방문객이 넘쳐났다. 생가 안을 보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생가 앞의 연잎이 자란 곳은 원래 연못이었다. 부친은 걸핏하면 주먹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마오 또한 어릴 적부터 굴복을 모르는 성정이었다. 자꾸 때리면 연못에 투신하겠다고 맞서자 부친의 구타가 사라졌다. 그의 삶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는 마오의 회고였다.


생가는 소지소혈에 불과하다. 양택이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마오의 증조와 조부는 마오 생가에서 서북쪽으로 4킬로 되는 적수동(滴水洞)에 자리한다. 2011년 간산할 때는 방향감각이 없어서 한참을 헤맸다. 우연히 지역의 가이드(導遊) 아가씨를 만나 50위안을 쥐어주고 묘소를 안내받았다.

 

증조부 묘소부터 소개한다.
 

마오쩌둥 증조부 묘소. 비석에는 모공사단대인묘(毛公四端大人墓)라 새겨져있다. 그는 1823년에 태어나서 1893년에 사망했으니 모택동이 태어나기 직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농사만 지었다고 한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1917년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흉지에 자리하니 마오 형제들의 삶에 불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오쩌둥 증조모 묘소

마오쩌둥 증조모 묘소. 비석에는 고현비모모주로유인지묘(故顯妣毛母周老孺人之墓)라 적혀있다. 주씨는 1820년에 태어나 1879년에 사망했으니 마오가 태어나기 15여 년 전의 일이다. 묘소는 북향(丁坐癸向)을 하고 있다.

 

마오쩌둥 증조모 묘소

묘소는 24회절의 명당이니,


요즘 기준으로 대기업의 추동도 가능한 역량이다. 마오의 부친은 병졸(兵卒)생활로 받은 퇴직금과 근면한 생활로 중농(中農) 정도의 부(富)를 축척했다. 증조모 묘소의 풍수적 도움이 많았을 것이다. 맥로는 백호방 먼 곳에서 출발한 것으로 묘역 전면에서 방향을 틀어 묘소에 정확히 명당을 맺었다.

 

조부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

조부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 증조모 묘소에서 수 백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호헐평(虎歇坪)이란 곳이 나타난다. (2011년, 간산할 때는 없었던 계단이다)

 

마오쩌둥 조부 묘소

마오쩌둥 조부 묘소. 적수동 호헐평 소재. 비석에는 익신(翼臣)이라 새겨져 있다.


마오의 조부는 1846 (道光 26)에 태어나 평생을 농사만 지었다. 집안 형편이 빈곤하여 열심히 일하고 검약하게 살았다고 한다. 1904년(光緖 3)에 병으로 사망하자 이곳에 모셨으니 향년 58세였다. 훗날 국민당 군인들이 이곳을 훼손하려 할 때 주변의 사람들이 묘비를 땅속에 묻어서 묘소의 위치를 숨겼다고 한다. 손자 이름에 모택동(澤東)과 두 동생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없는 것도 그럴 듯 하게 지어내는 것이 중국인이다. 공산당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 나왔으니 전설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오의 증조부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호랑이가 쉬어간다는 이곳(虎歇坪)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두 아들에게 알려줬다. 덕신(德臣)과 익신(翼臣) 형제는 먼저 죽는 사람이 이곳을 묻히기로 약속했다. 뜻밖에도 동생인 익신이 먼저 죽어 이곳을 차지한다. 익신의 아들 순생(마오의 부친)은 명당을 검증하기 위하여 근처에 관을 놓고 기다렸다 1912년이 되어서야 땅에 묻었다. 안장 당시 주변은 모두가 돌이었고 관(棺)을 넣을 만큼만 흙이었다. 관을 광중(壙中) 묻자 사방에서 퉁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훗날 묘주(墓主)의 손자인 마오가 상감(湘赣, 호남성과 강서성)일대에서 혁명활동을 하니 마오는 신선이 현신한 인물이다, 진룡천자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묘소로 진입하는 맥로도.

묘소로 진입하는 맥로도. 기실 맥로의 출발은 항공사진을 찍어도 표시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으로 48회절 명당의 핵심에 정확히 자리한다.


마오가 20대부터 맑스주의에 심취하여 공산당을 조직한 이래 1934년의 대장정에 살아남고, 1949년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전적으로 천하대지인 조부 묘소의 풍수파워에 기인하다. 마오도 생전에 자신의 조부 묘소가 명당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조부 묘소에서 내려와 동네 사람에게 마오의 할머니 묘소를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봐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마오 부모묘로 가는 묘도(墓道)의 패방

마오 부모묘로 가는 묘도(墓道)의 패방. 이것도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마오쩌둥 부모 묘소.

마오쩌둥 부모 묘소. 생가에서 북북동쪽으로 1킬로도 안되는 나지막한 산에 모셨다.

현지에서는 이곳을 남죽택(南竹垞)이라 부른다. 1920년, 두 분을 합장으로 모셨다.

묘는 서북좌 동남향으로 모셨다. 훗날 마오가 모친을 애도하는 <제모문(祭母文)>비(碑)가 봉분 옆에 세워져 있다.


부친 모순생(毛順生, 1870~1920년, 향년 50세)


세상이 험난한 시절이었다. 순생은 돈을 모으기 위해 군대 생활을 자원했다. 몇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자 수중에 적지 않은 돈이 생겼다. 농토를 사고 돼지 등을 키우면서 차곡차곡 재산을 늘려갔다. 나중에는 소도 키우고 쌀을 수매하여 다른 지역으로 되팔 정도의 재력이 생겼다. 어릴 적부터 체격이 좋은 마오에게 밭에 인분을 나르는 고된 일을 시켰다. 아들의 공부는 회계장부를 정리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삼국지·수호지 등을 읽으면서 원대한 꿈을 키웠던 마오. 난폭한 부친과 반항적인 아들은 불화할 수 밖에 없었다.


모친 문칠매(文七妹, 1867 ~ 1919년, 향년 52세)


문칠매는 18세에 모순생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낳았지만 마오 3형제만 성인이 되었다. 그는 무학이었지만 불심이 두터웠다. 어린 마오를 데리고 동네 돌부처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마오가 모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의 전기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친에 대한 감정은 아주 심술궂다. 에드가 스노(Edgar Snow, 1905~

~1972년)와의 대담 중에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비행기(고문의 일종)를 태워 줄텐데 라며 낄낄대며 아쉬워하는 기록도 있으니 말이다.


마오는 모친의 선량하고 온후한 심성을 좋아했다지만, 정치역정에서 보여준 그의 기질은 부친의 끈질긴 근성과 난폭함을 빼닮았다는 생각이다.

 

위대한 영도자를 낳은 부모 묘라고 여겨서 인지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필자의 맥로이론에 의하면 기(氣)는 이곳 묘소에 머물러 명당을 만들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흉지이다.


마오의 두 동생.


마오쩌민(毛澤民, 1896~1943년). 항일전쟁 시기에 신강(新疆)지역에 파견되었다가 셩스차이(盛世才)란 군벌에게 체포·처형됨.


마오쩌탄(毛澤覃, 1905~1935년). 루이진(瑞金)에서 국민당군과 교전 중에 사망.


마오가 대장정 등 험난한 과정을 견뎌내고 끊임없는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천하대지인 조부묘의 풍수파워를 제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동생이 난세에 희생된 것과 마오가 집권이후 폭정으로 수천만명의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한 것은 부모 묘소의 영향이라는 판단이다. 명당은 명당대로 흉지는 흉지대로 그 기운을 작동한다. 명당이 흉지의 나쁜 작용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펑더화이 묘소
 

평생을 공산혁명에 투신했으나, 마오에게 팽(烹)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대표적 사람이 류샤오치(劉少奇)와 펑더화이(彭德懷)이다. 두 사람은 마오의 생가에서 각각 30~40킬로 떨어진 같은 동네 출신이다.
 

류샤오치는 문화혁명 기간 중에 비밀리에 참혹한 죽임을 당하고, 훗날 그의 골분(骨粉)은 바다에 뿌렸으니 묘소가 남아있지 않다.


펑더화이(1898 ~ 1974년)는 누구인가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 유역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로 소위 1.4후퇴를 하게된다. 당시 중공군의 총사령관이 펑더화이였으니, 우리의 통일을 방해한 웬수란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928년 펑더화이는 징강산(井岡山)에서 마오를 만나 30년의 세월을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펑더화이가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 등의 수 많은 전투에서 공산당과 마오를 지켜낸 화려한 전적(戰績)은 생략한다. 남의 칭찬에 인색한 마오조차 한 때는 “나의 펑(彭)대장군”이라는 헌시(獻詩)를 보냈었다.


1959년 7월에 루산(廬山)에서 회의가 열렸다. 신선처럼 놀고나서 대약진 운동을 계속 추진하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대약진의 실패를 지적하는 펑더화이의 편지가 공개되자 분위기는 살벌하게 변했다.


펑더화이에 대한 마오의 누적된 의심과 불만이 터져나왔다. 우선 국방장관에서 해임한다. 군부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1962년 6월, 펑은 거짓으로 강요된 비판이 억울하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묵살된다. 1965년 9월, 쓰촨(四川)의 건설위원회 부주임으로 좌천된다. 1966년, 문화혁명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반동 주자파(走資派)라고 낙인었다. 12월에는 펑더화이를 베이징으로 압송한다. 반당·반사회 등 온갖 흉악한 대역죄인의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100여 차례가 넘는 비판집회(批鬪會)에 끌고 다니며 망신을 준다. 백만대군을 지휘했던 펑더화이가 어린 홍위병들의 구타와 고문으로 늑골이 부러지고 폐(肺)가 손상되는 등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1973년, 진단결과 직장암이 온 몸으로 전이되어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4년 11월, 한 많은 76년의 인생을 마감한다.


홍군(紅軍)의 아버지라 불린 주더(朱德,1886~1976년)의 입에서 “이게 어디 옛날에 한솥밥 먹던 사람끼리 할 짓이냐”며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묘소를 찾아갔다.

 

펑더화이 조상(彫像)

펑더화이 조상(彫像)


펑더화이가 태어난 마을에서 뒤로 수백 미터를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다고 했다. 많은 계단을 올라가니 광장같이 넓은 곳에 펑더화이의 대형 조상(彫像)이 나타났다.

 

펑더화이 묘소

펑더화이 묘소. 샹탄시 우스봉(湘潭市 烏石峰) 아래에 자리한다.


검은색 화강암의 모름모꼴로 조형된 곳에 펑더화이의 유골이 안장되었다.


묘소는 뒤로는 와호산(臥虎山)을 기대었고, 전면으로는 10여 리의 산천이 눈 아래로 들어온다.


1974년 11월, 펑더화이가 죽자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화장하여 청두(成都)의 장례식장 근처에 매장했다. 비석에는 32세 왕촨(王川)이란 가명을 새겨놓았다. 이 비밀스런 작업은 저우안라이(周恩來)총리의 지시로 진행되었다. 1976년 9월, 마오가 사망하자 소위 문혁을 주도했던 “사인방”이 제거되었다. 1978년 겨울,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를 받은 공안부 요원들이 납골묘를 찾아내어 베이징의 빠바오산(八寶山)공원묘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 10월, 펑더화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조카딸의 요청으로 당의 비준을 받아 펑더화이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멈추는 15회절 명당에 안장했다.


정부에서는 펑더화이의 기념관도 만들고 묘역을 대대적으로 확장 수리하였다. 많은 추모객들이 참배하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지만 억울한 죽음의 원인과 과정에 대하여는 여전히 침묵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마리안(馬立安) 묘소
 

펑더화이 묘소에서 동남쪽으로 20여 킬로를 내려가면 샹탄현 따허탕(大荷塘)이란 마을이 있다. 그 곳의 찾아간 이유는 타이완 총통을 지낸 마잉조(馬英九)의 조부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논과 밭이 뒤섞인 벌판이라 묘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서 찾았다.

 

마리안의 묘소

논 한가운데 측백나무와 트렉터 사이에 마리안의 묘소가 있다.


마리안 (1868~1927년)의 묘소는 손자가 타이완에서 총통이 되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마을에도 많은 선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당을 좋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안의 묘소

마리안 묘소.

묘소는 민국 17년(1928)에 축조했다고 기록되었다. 묘비 가운데는 “현고마공대기노대인묘(顯考馬公大基老大人之墓)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아들 인송(人松)과 손자 영구(英九)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 인송은 마잉조의 부친 마허링(馬鶴凌)의 다른 이름.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28회절 명당을 맺은 곳에 마리안의 묘소를 모셨다.

마잉조가 대륙에서 공산당원이 되었다면 총리는 물론이고 어쩌면 총서기까지도 가능했을 풍수역량을 지닌 곳이다.


마잉조의 부친 마허링(馬鶴凌)이 2005년 별세했고, 마잉조는 2008년 선거에서 총통으로 당선되었으니 부친 묘소가 금시발복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5년, 마허링의 유해를 모신 타이완의 후더납골당(富德靈墓堂)을 간산해 보니, 좋기는 하지만 대명당은 아니었다. (직접 참배는 불허, 납골당만 보았음)


마잉조는 부친이 생존할 때인 1998년과 2002년, 수도 타이베이(台北)시장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으니 조부 묘소의 발음(발복)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판단이다.
 

@ 2003년 4월, 마잉조가 가족들을 데리고 조부인 마리안의 묘소를 성묘했다. 묘소는 샹탄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고 묘역도 새롭게 단장하였다. 중국인들은 이런 배려는 잘하는 사람들이다.
 

@ 호남성이 배출한 전 국가주석 류샤오치, 전 총리 주롱지(朱鎔基), 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고거(故居)는 방문했지만 선영은 찾지 못하였다.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년)의 현달은 그의 조부 묘소를 간산하고서 납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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