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콩국수는 이제 미련 없다
애가 탄다. 콩국수 때문이다. 언제부터 콩국수가 이렇게 좋아졌을까? 콩이라면 쏙쏙 골라내던 나였는데... 나이 들면 사람 입맛도 변한다더니 내가 그 증인이 될 줄이야. 올 여름은 특히나 콩국수를 즐겨 먹었다. 왜 그런가 봤더니 내 입맛에 맞는 콩국수를 찾겠다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기 때문이다.
1호는 중국집. 중국집에서 웬 콩국수냐 하겠지만 이 집 콩국수는 그래도 입맛에 맞다. 입맛에 맞기는 한데, 늘상 가기는 좀 그렇다. 왜? 콩국수 한 그릇에 1만 2000원. 비싸다. 서울 번화가도 아니고 동네에서. 그래서다. 좀 저렴하고 맛있는 콩국숫집을 찾아내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찾아간 2호는 동네 국숫집. 잔치국수 전문인데 여름 특별메뉴로 콩국수도 한다고 했다. 가격은 8천원. 어디 한번 먹어보자. 흠... 맛이 좀... 느껴지지 않는다. 콩국물의 고소함도 시원함도 뭐도 없다. 이렇게 맑은 국물의 콩국수는 처음이다. 콩을 아꼈나. 땅콩가루도 뿌렸는데 고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사람들 평은 괜찮다고 했는데 이 집 콩국수 먹고 다른 집은 못 간다고 했는데 어쩌나. 나는 다른 콩국숫집을 택할 것 같다. 다시 깨닫는다. 맛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걸.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가는 곳곳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콩국수 맛있게 하는 데 어디 없을까. 그러다 넘어가게 된 이웃동네 3호 콩국숫집. 가격은 9500원. 허허, 이 집은 무려 서리태 콩국수다. 맛이 없을 리가 없고 오후 6시도 안 되어서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6시 조금 넘으니 만석이다. 세상에. 이 콩국숫집엔 뭐가 있는 걸까?
이 집 콩국수는 거칠다. 고운 입자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다. 국수 양도 많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역시 내 입맛은 아니다. 분명 1호보다는 걸죽하고 고소하다. 그런데 뭔가 당기는 맛이 없다. 콩국물만으로도 마음을 잡는, 아! 하고 탄성이 터지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정도는 아니다. 면도 살짝 아쉽다. 짜장면 면발에 가까운 면을 쓴다. 밀가루 맛이 콩물의 고소한 맛을 떨어뜨린다. 다시 또 깨닫는다. 맛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걸.
3호 콩국숫집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허탈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그때 번뜩 두부집이 생각났다. 직접 두부를 만드는 두부집. 거기도 콩물이 팔겠지? 두부가 맛있으니까 콩물도 맛있지 않을까? 마침 근처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라 천천히 두부집으로 향했다(이정도 정성이면 입맛에 맞는 집이 나타낼 만도 한데...). 예상대로 콩물을 가득 팔고 있었다. 백태콩물과 서리태콩물 두 종류를 팔고 있었는데, 나의 선택은 서리태 콩물. 혹시 몰라 작은병 500ml(콩국수 2인분 가능)으로 구입했다. 5000원(1L는 9000원)
집에 가져와 컵에 따라보니, 오메. 너무 농도가 되직해서 따라지지도 않는다. 병을 눌러 짜듯 겨우 컵에 담아 한 입 먹는데... 짜다. 간이 세다. 윽... 또 실패인가. 집에 있는 두유를 조금 섞어보니, 그제야 내 입맛에 80% 정도 맞는 맛이 나온다. 집에 있는 소면을 약간 삶아 콩국수를 먹는데 웬만한 식당보다 나은 듯했다. 식당이 아니라 두부집에서 사다 콩국수를 만들어 먹어야 하나.
동네에서 콩국숫집 찾는 일을 포기했다. 더이상 갈 데도 없고 맛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올 여름 입맛에 맞는 콩국수 찾기가 포기되는가 했는데, 세상에나. 인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뤄졌다. 동네는 아니다. 좀 멀다. 충북 청주.
모처럼 대학 선배를 청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폭염 때문에 청주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랑 국립청주박물관 투어 등 실내 코스를 잡았다. 선배는 청주에 살면서도 애들 아주 어렸을 때 국립청주박물관 정도만 가봤지 국립현대미술관은 처음이라고 했다. 미술관 주차장으로 향하던 선배가 한 김밥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점심은 저기 국숫집에서 잔치국수 먹자. 3000원이었는데 4000원으로 올랐네. 3000원일 때 아들이랑 둘이 와서 우리 2만원 어치 먹었잖아. 맛있어."
그러고 보니 선배가 결혼할 때 먹은 피로연 음식이 국수였다. 아, 청주가 국수로 유명했던가. 그래도 이 더운 날 잔치국수는 좀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터라 아무래도 좋았다. 국립현대미술관 투어를 충분히 했더니 슬슬 배가 고팠다. 김밥집으로 가자.
그런데 이게 뭐야. 잔치국수 맛집이라더니 여기도 콩국수를 파네? 선배는 잔치국수를 시키고 나는 고민 끝에 콩국수를 시켰다. 가격은 7000원. '이번에도 아니면 정말 끝이야. 더 이상 콩국수에 미련 없어' 하는 마음으로.
안 시켰으면 큰일 날 뻔했다. 너무 맛있었다. 내 입맛에 딱이다. 소금을 넣지 않아도(원래 소금도 설탕도 안 넣는다) 콩물 본연의 맛으로도 충분한 간, 국수의 적절한 삶기, 부드럽게 혀에 퍼지는 콩 입자와 적당한 국물 농도. 알맞은 얼음. 게다가 가격까지! 이정도면 90% 이상이다. 콩국수 안 먹는다는 선배를 앞에 두고 국물까지 싹싹 설거지 하듯 비워냈다.
잔치국수 맛집입니다만, 여름엔 콩국수 맛집이라 해도 손색없는 이 집, 나만 알련다. 청주 가면 꼭 또 먹을 거다. 자세히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위치 힌트는 이미 말했다. 올해 콩국수는 이제 미련 없다. 정말 끝이다. 마지막으로 청주 여행 팁을 하나 드리면, 국립현대미술관-김밥집 잔치국수(콩국수)-국립청주박물관-베이커리카페 공간이면 만 원으로 하루가 시원하게 행복하다. 언제 또 갈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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