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종교전쟁 끝난 뒤… 佛 가톨릭, 아시아로 눈돌려 한반도까지 약진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3. 8. 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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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9] 가톨릭과 한반도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은 청 제국과 러시아의 대전을 막았다. 라틴어로 조약문을 쓴 페레이라(Thomas Pereira) 신부는 북경에서 네르친스크까지 갔다. 직선으로 약 1350km가 넘는 거리다.

페레이라 신부의 고국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맺은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에 따라 브라질 지역부터 태평양까지 가톨릭을 전파, 보호하는 보교권(保敎權, Protectorate of missions)을 인정받았던 나라였다. 포르투갈의 보교권은 리스본에서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아시아의 고아, 믈라카, 마카오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이어졌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테오 리치도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고아를 거쳐 명나라에 입국했었다. 포르투갈 예수회가 주도한 청제국과 달리 이후 한반도가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선교구역으로 들어간 것은 중화문명권과 한반도를 분리시키는데 기여했다.

제사 문제에 막힌 포교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한 페레이라 신부의 노고는 강희제의 인정을 받았고, 1692년 가톨릭교를 포용하는 용교령(容敎令)이 반포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기회였다. 그러나 가톨릭이 널리 전파될 수도 있었던 기회는 제사 문제로 인해 사라졌다.

가톨릭 교회 내의 다른 교파들에서는 예수회가 제사 참배를 용인한 것을 문제 삼았다. 단순히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수준이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본 것이다. 결국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 칙령을 통해 가톨릭교인들의 제사 참배를 금지했다. 이에 맞서 강희제도 용교령을 철회했다.

제사 문제는 훗날 조선에서도 천주교 박해의 사단(事端)이 되었다. “효성(孝誠)이 지극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주무시는 부모를 공양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아주 잠든 때에는 어떻겠습니까”라며 제사 강요의 부당성을 호소했던 정하상(정약용의 조카)은 결국 목숨을 잃는다.

포르투갈 대신 약진한 프랑스의 가톨릭

1689년 네르친스크까지 동행했던 또 한 명의 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이었다. 그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출신의 지리 전문가였다.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이후에도 강희제의 뜻에 따라 만주 및 몽골 지역 등의 역사 지리를 연구했다. 그가 축적한 지식들은 같은 프랑스 출신의 레지(Jean-Baptiste Régis, 1663~1738) 신부에게 계승되었다. 레지의 고조선 사료는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서 자주 인용된다.

원래 가톨릭(catholic)을 형용사로 쓰면 ‘보편적’이라는 뜻이 있다. 특정 국가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리슐리유 추기경(Cardinal Duke of Richelieu, 1585~1642)은 루이 13세의 재상이기도 했다. 그는 국내에서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국제적으로는 국가이성(raison d’Etat)적 차원에서 작은 개신교 국가들을 지원했다. 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 교황청,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이어지는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프랑스가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648년 30년 종교전쟁이 끝난 이후 프랑스 가톨릭은 유럽 밖으로 눈을 돌렸다. 1658년에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교황청이 보교권을 부여했던 포르투갈과는 다른 경로로 아시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스 가톨릭과 조선 천주교

1784년 외교사절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은 프랑스 출신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신부를 만나 영세를 받고,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승훈은 제사 금지령에 반발하기도 했으나 회심한 후 1801년 순교했다. 같은 해에 청나라 출신 주문모(周文謨) 신부도 조선에서 순교했다.

지배층의 박해를 받으며, 조선의 천주교 교세는 더욱 강해졌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한역(漢譯)된 서적들을 통해 가톨릭을 수용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교황청에 직접 서한을 보내 조선을 독립된 선교 구역으로 설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 세계 선교사에서 독특한 경우였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을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시켰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사역을 이어갔다. 시암(타이)의 방콕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ére) 신부는 자신을 조선에 파견해줄 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요청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조선에 파견된 3인의 프랑스 출신 신부들(모방, 샤스탕, 앵베르)은 정하상 등과 함께 순교했다(기해박해, 1839). 정하상은 “무당, 풍수쟁이, 점쟁이, 관상쟁이들이 부인들을 꾀어 돈과 재물을 빼앗아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면서, 천주교에만 유독 포용의 아량을 베풀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호소했지만 유교 지배층의 관용은 없었다.

박해 끝의 영광

1860년 베이징조약(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864년 함경도 경흥에서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정부는 경악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리는 방책이 승지 남종삼 등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통해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이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1866년 1월 남종삼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포함해서 약 8000명이 순교했다(절두산, 병인박해). 그해 가을 천진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했다가 정족산성에서 패퇴했다(병인양요).

그로부터 20년 후인 1886년 프랑스 선교사들은 대조선국-대법민주국 통상조약(大朝鮮國 大法民主國 通商朝約) 제9관에 교회(敎誨, 포교를 의미)라는 애매한 단어를 넣는데 성공했다. 모진 박해가 끝나고, 약현성당(1892)과 명동성당(1898)이 세워졌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E. G. Coste) 신부가 건축 설계를 맡았다.

남겨진 트라우마

프랑스 가톨릭이 포교의 자유를 얻기 전까지 조선에서 당한 박해의 역사는 정치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 프랑스 출신의 뮈텔(Gustave C. M. Mutel, 1854~1933) 주교는 일제와 타협하면서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계속 보장받고자 했다. 처음에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토마스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 여순 감옥까지 찾아가 고해성사를 집전한 프랑스인 신부 빌렘(Nicolas J. M. Wilhelm, 1860~1938)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징계했다. 1919년 3·1운동 33인 대표들 중 개신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에 비해 천주교 대표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은 그러한 선교 방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결국 정교분리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종국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등 종교들을 천황제 이념의 전파 도구로 만들고자 했다.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 순교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의 가톨릭은 또 한 번의 박해를 경험하게 된다. 일제 치하에서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독일에서 파견된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덕원에 수도원을 세웠다. 덕원을 중심으로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김봉식 마오로 신부, 박빈숙 루치아 수녀 등 38인이 1949년과 1950년 사이 북한에서 순교했다.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1927년에 지은 함경도의 성 베네딕도 덕원 수도원(뒤쪽)과 이듬해 완공된 덕원 신학교 전경.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공산주의자들은 가톨릭이 전파된 세계 여러 지역들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던 사례들을 들어서 종교를 식민주의의 아편처럼 취급한다. 물론 종교가 식민주의에 오용되었던 사례들도 많았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종교를 현세의 희소가치를 놓고 투쟁하는 좌우 정치의 도구로 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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