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도 기소 검사도...트럼프 ‘저승사자’로 흑인 법조인 줄 섰다

정지섭 기자 2023. 8.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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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조직범죄법’ 기소한 검사장
트럼프가 “미치광이”라 욕한 흑인
3번째 기소 재판장도 흑인 女법관

지난 14일(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내의 풀턴카운티 지방검찰청. 파니 윌리스(52) 검사장이 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루돌프 줄리아니(전 뉴욕시장)·마크 메도스(전 백악관 비서실장) 등 피고인 19명의 이름을 직책 없이 부르며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 때 조지아주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혐의(조직범죄법 위반)로 네 번째 형사 피고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트럼프 못지않게 주목받은 인물이 흑인 여성인 윌리스 검사장이다. 트럼프는 그간 윌리스를 ‘인종차별주의자’, ‘미치광이 마르크스주의자’ 등으로 거칠게 비난해 왔고, “(윌리스가) 갱단 멤버들과 유착관계가 있다”고도 주장하는 등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 왔다고 CNN은 전했다.

파니 윌리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검사장이 14일 검찰청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19명의 기소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대선을 1년 3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사법 리스크’에 직면한 트럼프가 재판정에서 잇따라 흑인 여성 판사·검사들과 마주하며 법정싸움을 벌이게 됐다. 트럼프의 생살여탈권을 쥔 ‘저승사자’ 역할을 할 흑인 법조인들은 공교롭게도 민주당원이거나 민주당 정권과 인연이 있다. 이 때문에 이 재판들이 사건 본질과 다르게 인종 대립, 정치 갈등 구도로 얽혀 대선의 돌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선 결과를 뒤바꾸려는 트럼프 측의 시도에 대해 마피아를 겨냥해 만든 조직범죄법을 적용한 윌리스는 앞서 지난해 유명 흑인 래퍼 영 서그를 기소할 때도 같은 법을 적용했다. 특히 적의(敵意)가 담겨 있는 랩 가사를 증거로 첨부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윌리스는 2021년 1월 취임 소감에서 아버지가 급진주의 흑인결사단체인 ‘블랙 팬서’에서 활동한 흑인중심주의자이고, 자신의 이름 파니가 스와힐리어(케냐·탄자니아 등에서 많이 쓰는 아프리카어)로 ‘번영’을 뜻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흑인 정체성을 강조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결과 조작 의혹 사건을 심리하게 된 타냐 처트키 워싱턴 연방지법 판사. /AFP 연합뉴스

앞서 트럼프가 세 번째로 기소됐던 사건인 ‘대선 결과 인증 방해’의 재판장 역시 자메이카 태생의 흑인 여성 법관인 타냐 처트칸(61) 워싱턴DC 연방지법 판사다. 2014년 버락 오마바 행정부에서 임명된 처트칸은 이미 다른 사건에서 트럼프 측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2021년 1월 6일 의사당 난입 사태를 일으킨 트럼프 지지자 38명에 대해 전원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이 중 절반은 검찰 구형량을 100% 인용하거나 오히려 더 무거운 판결을 내렸다고 VOA(미국의 소리)는 전했다.

2021년 11월에는 의사당 난입 사태의 전모가 담긴 백악관 문서를 의회 조사위원회가 볼 수 없도록 막아달라는 트럼프 측의 요청을 퇴짜 놓으면서 “대통령은 왕이 아니며, 원고는 대통령도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트럼프 측은 최근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민주당 초강세 지역인 워싱턴DC에서는 배심원단 구성 등에 있어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지만, 처트칸과의 악연이 결정적 요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세 자녀 등을 상대로 부당이익금 환수소송을 제기한 레티샤 제임스 뉴욕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로이터 연합뉴스

민사법정에서도 트럼프는 또 한 명의 흑인 여성 법조인과 맞닥뜨려야 한다. 레티샤 제임스(65) 뉴욕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이다. 그는 뉴욕주가 지난해 9월 트럼프를 상대로 제기한 2억5000만 달러(약 3444억7500만원) 규모의 부당이익금 환수 소송의 대표 원고다. 뉴욕주는 트럼프 가족기업 트럼프 오거니제이션이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받기 위해 자산가치를 부풀리고, 탈세를 위해 자산 가치를 축소하는 등의 기망 행위로 거액의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보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민사소송이지만, 형사 공판의 성격이 강하다.

여성은 아니지만, 지난 3월 트럼프를 역사상 최초의 ‘피고인 전직 대통령’으로 만든 성추문 입막음 사건의 지휘 검사도 흑인 최초의 맨해튼 지검장 앨빈 브래그(50)다. 그 역시 기관 홈페이지에 자신을 ‘할렘(뉴욕의 흑인 빈민가)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인종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인모델 입막음 사건을 수사 지휘한 앨빈 브래그 뉴욕 맨해튼 지검장. /AP 연합뉴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 등을 통해 자신의 명줄을 쥔 흑인 법조인들을 비난해 왔다.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이 거액 투자자 조지 소로스로부터 후원받은 사실을 거론하며 ‘짐승(animal)’이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제임스 뉴욕주 법무장관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무능하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특히 자신을 제소한 세 명의 흑인 검사를 아무 근거도 없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고 있고, 이들이 마치 정적(政敵)인 양 별명을 갖다 붙이고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검사뿐 아니라 자신의 유무죄 여부를 결정할 처트칸 판사에 대해서도 “매우 편견에 사로잡혀있고 불공정하다”고 비난했다.

자신을 옥죄어오는 사법 리스크를 지지층 결집의 도구로 활용하는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주 유튜브에 ‘사기꾼 분대(Fraud Squad)’라는 1분짜리 동영상을 올렸다. 자신의 백악관 문서 유출과 대선 인증 방해 사건을 수사한 잭 스미스 특검과 흑인 검사(윌리스·제임스·브래그) 세 명을 무능하고 부패한 법조인들로 묘사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통속으로 묶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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