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정치 리더십의 테스트베드
엄중한 국내외 현실 직시…국가 난제 해결 앞장서야
박철규 국립 일제 강제동원역사관장
올해는 광복 78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이다. 8·15와 정전협정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해방공간은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이 포함된 8년간을 지칭한다. 이곳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여러 난제와 해결책의 원형과 전형이 녹아 있기도 하다.
흔히 ‘모든 나라는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경구인가 정치적 레토릭(Rhetoric)인가.
8·15가 광복이냐 해방이냐 라는 용어나, 우리가 쟁취한 8·15냐 아니면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선물이냐는 등의 논쟁은 별론으로 하고, 다시는 나라를 잃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각골명심하고, 이제는 ‘강도 일본’을 만나서 망했다는 따위로 변명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된 이유를 내재적인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야 한다. 특히 당시 정치 리더십의 긍정적 역할에는 박수를, 과오에 대해서는 역사적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각계각층에서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Vortex)에서 제기된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고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다만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을 일차적으로 구속해 왔던 일제의 식민 지배로 인한 식민주의,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오랜 군사정권의 잔재 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어느 시점부터 답보상태로 보인다.
8·15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장이 열렸으며, 정치 리더십에 테스트베드가 제공된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민족 반역자와 부일협력자의 청산과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개혁, 그리고 민주적 제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임시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남침을 유도했느냐, 국내전이냐 국제전이냐는 등의 성격은 논외로 하고,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참혹한 피해는 수치상으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된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상태로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았다. 남북한 모두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과 피해를 초래한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그 어떤 명분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한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만 하면 상존하는 전쟁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협정 체결이 지닌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미국과 소련은 인류의 공멸을 초래할 전략핵무기를 포함한 상호 군비축소를 단행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자주국방이라는 기치 하에 ‘군비축소’ 또는 ‘상호군축’이 아니라,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하여 전쟁 위협을 제거한다는 ‘군비통제’가 기본방침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최근 국내외 정세로 남북한 UN 동시 가입이나 평화협정 체결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반도에서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남북 사이의 평화가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한·미·일’과 ‘북·중·러’ 삼각안보체제가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존 통념을 무너뜨렸다. 한반도의 휴전선에는 ‘세계의 화약고’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화력이 집중되어 있어,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제한전조차도 시도되지 못할 것으로 간주해 왔다.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포함한 비대칭전력 개발에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런데 최근 국내외 정세로 그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한 듯하다. 그 점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는 UN 상임이사국임에도 전쟁을 시작하고, 핵무기를 포함한 비대칭전력은 사용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간 국제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크고 작은 국지전은 대개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국내외 정세는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해방공간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엄중하고 어수선하다. 어떤 이는 특정 언론에서 한반도가 정전 이후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으며, ‘한민족 핵전쟁으로 공멸가능성, 단군 이래 최악위기’라고까지 주장 한다.
정치 리더십은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올랐다. 위기는 기회라 했다. 정치 리더십의 대다수는 목전의 총선준비에 몰입해서인지,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재선(Reelection)의 첩경은 패거리, 줄서기만이 아니다. 정상 국가에서는 정치 리더십이 헌법적 가치 아래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고,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난제를 해결해 갈 때, 사회적 합의와 공감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레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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