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팔길이 원칙 흔드는 손바닥 길이
팔을 펼쳐 길이를 재어본다.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두는 것, 예술과 정치의 거리두기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문화정책의 기본 토대이다. 1945년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즈가 영국예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주창해 지금은 UN에서도 권고하는 행동강령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지금 다시 새삼스럽게 ‘팔 길이 원칙을 아십니까?’라고 대답 없는 그 누군가에게 묻는다. 아니 ‘팔 길이 원칙을 알고 말씀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다.
문화예술과 행정 사이의 거리두기는 오래된 연인처럼 애증이 교차하는 순간들의 연속인 것 같다.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 위의 배우들처럼. 그러나 언제나 균형과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 그 누구도 넘어지거나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팔 길이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술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개인의 개별성과 집단의 다양성을 끌어내어 사회에 자극을 준다. 낯선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드러내어 혁신적인 자극을 일깨우기도 한다. 사회에 공헌하는 예술의 다양한 방식 중의 하나다.
보편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는 행정에서는 난감할 수도 있다. 낯선 것은 선례나 사례가 없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근거를 찾아 규정에 맞게 해야 한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예술이라 예술은 행정이 될 수 없지만, 예술을 지원하는 예술행정은 예술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예술행정은 예술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사회에 공헌하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예술행정은 예술처럼.
최근 지역에서 다소 의미 있는 행사를 공공기관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데 담당자로부터 “행사에 필요한 행정적인 어떤 것이라도 신속하게 지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팔 길이 원칙은 모른다고 했다. 그럴 수 있지, 일반직 공무원 모두가 다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해야 하는 그의 업무는 행사를 위한 행정지원이라는 아주 단순하며 간결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번 자잘한 행정상의 문제들을 순조롭게 해결했고 넘어지거나 떨어지지 않으며 창조적 균형을 유지했다. 예술을 대하는 예술행정의 예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창조적 균형을 위해 예술의 본연적 가치를 행정에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매번 근거를 찾고 규정집을 뒤져서 안 되는 것을 염려하는 탁상공론을 뒤로하고 예술적 가치를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예술행정이니까.
그러나 행정의 실천 과정에서는 ‘손바닥 길이(palm’s length)’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자주, 종종 있다. 예술계 블랙리스트에서 급조된 잼보리 폐영식 K-팝 동원까지 표면적으로는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노골적으로 손을 대고(arm’s length but hands on)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지역에서 행정의 결정권자가 바뀔 때마다 손바닥 안에 두고 싶은 예술, 반복되어 달라지는 예술행정의 기조는 결코 예술답지 않다.
누가 떠밀어서, 강요해서, 억지로 예술하는 예술인은 없다. 당장 굶어 죽더라도 예술은 해야 하는 신기 충만한 예술가들에게 행정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질문만 하면 좋겠다.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는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받을 것이며 각종 보고서는 행정의 달인들이 해주면 좋겠다. K-컬처 콘텐츠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문화산업 예술가들에게는 그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다. 문화자본시장 안에서 자생하고 소멸하며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방탄소년단(BTS)이 정부의 행정지원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의 기조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팔길이 원칙’이며 이를 지키겠다”고 강조한 대통령실 앞 잔디마당에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사진과 뉴스는 불과 지난해 6월, 칸국제영화제 수상자들과 함께였다.
팔 길이 원칙을 우리는 이제 모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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