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배워도 괜찮아”… ‘느린 학습자’ 위한 대학생 멘토 찾아드려요
일대일 멘토링해 사회적 자립 도와… 개인별 학습 속도 따라 맞춤 지도
30초마다 들썩이던 아이도 집중… 체계적 지원으로 서비스 대상 늘길
14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만난 이유진 씨(23·미디어학부 4학년)는 느린 학습자로 불리는 ‘경계선 지능’(지능지수 71∼84) 학생을 지원하는 플랫폼 ‘느루잉’을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느루잉은 초등생 느린 학습자들에게 일대일 대학생 멘토를 연결해 공부를 가르치고 사회적 자립을 돕는 서비스다. 약 1년간의 준비 끝에 이르면 이달 말 서비스가 출시된다.
● ‘사각지대’ 놓인 경계선 지능 학생들
느루잉은 일반인과 장애인 사이 사각지대에 놓인 느린 학습자를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고려대 ‘인액터스(Enactus)’ 회원들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인액터스는 대학생들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사회적 책임을 가진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 1975년 출범한 글로벌 비영리 단체다. 전 세계 36개국 1700여 곳의 대학이 속해 있고, 국내에서도 29개 대학 학생들이 활동 중이다.
경계선 지능은 전체 인구의 약 13%로 추정된다. 국내엔 아직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런 학생들은 학습 속도가 느려 일반 학급에서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이에 따라 교우 관계가 위축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아 특수교육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팀원인 소현 씨(23·기계공학 3학년)는 “장애와 비장애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법·제도 속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이라고 했다.
팀원 7명은 1년 가까이 특수교육 전문가, 느린 학습자 부모 등 다양한 관계자들을 만나며 서비스를 준비했다.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듣고, 선생님 겸 멘토가 되기 위해 유의할 점을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팀장 김지산 씨(25·중어중문 4학년)는 “‘느린 학습자 교육은 교사가 위에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내려가서 학생과 함께 올라오는 것’이라는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 학습 속도 맞추고, 자존감 키우고
올 5월엔 학생들을 지도할 서울 지역 ‘느루쌤(느루잉+선생님)’ 30여 명을 선발해 현재 양성 과정을 진행 중이다. 서울 구로구 느린 학습자 커뮤니티 ‘하랑’과 업무협약을 맺고, 지난달부터 놀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팀원들도 느루쌤으로 참여해 매주 2, 3번씩 아이들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느린 학습자를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 씨는 “글을 꽤 쓰고 말을 잘하면서도 자신감이 부족해 마음을 닫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을 세워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만의 학습 속도가 있는데, 일반 학교에선 많은 학생 사이에서 이들만을 위한 맞춤형 지도가 어려우니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느루쌤들이 그 속도를 맞춰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약 두 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이 씨는 “처음엔 30초마다 나가고 싶다고 하던 아이가 요즘엔 20분 이상 잘 집중한다. 장기적인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더 큰 변화가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느루쌤 활동 기간은 최소 6개월이다. 원하면 졸업 전까지 활동을 연장할 수 있다. 소 씨는 “느루쌤이 학생들을 대하는 전문성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아이들과 최대한 오랜 기간 정서적 교감을 갖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 낙인 거두고, 조기 진단 및 장기 지원 필요
고려대팀이 초등학생을 서비스 대상으로 정한 건 느린 학습자에겐 진단과 맞춤형 교육이 일찍 이뤄질수록 발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해당 가정에선 자녀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학습 부진으로 치부해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씨는 “다양한 발달 특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부족하다. 느린 학습자가 사회적 낙인이 되면 조기 발견이나 개입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최근 교육계와 지방자치단체에선 경계선 지능에 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해 6월 전국 최초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를 제정한 데 이어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런 학생들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지원 노력이 확산하고 있다.
고려대팀은 이런 움직임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더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느루잉은 초등생을 지원하지만, 입시 위주의 교실 분위기 때문에 개별 지도가 어려운 중고교생, 사회 진출을 앞둔 학생들의 취업과 진로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느루잉을 통해 지난달 인액터스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 고려대팀은 올 10월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인액터스 월드컵에 한국 대표로 출전한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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