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보조금 타드립니다”…연구개발사업 브로커만 1만곳 활개

고재원 기자(ko.jaewon@mk.co.kr), 이호준 기자(lee.hojoon@mk.co.kr) 2023. 8. 1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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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연합뉴스]
지방의 모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한 중소 제조업체.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 연구개발(R&D) 사업 지원을 준비하다 브로커 A씨를 만났다. A씨는 R&D 과제 수행을 미끼로 컨설팅과 서류작성을 대리해주겠다며 수수료를 요구했다. 사업을 따내면 지원금의 20%를 달라는 조건이었다.

적지않은 금액이지만 R&D 기획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 업체는 R&D 사업비 1억 원의 20%인 2000만 원을 브로커에게 지불했다.

최대 40%의 수수료를 요구하는 브로커들도 있다. 이런 브로커가 전국에 1만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7~2022년 8월까지 브로커 관련 신고가 40건이 있었지만 처벌된 경우는 없다.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민의힘 실무당정협의회에서 R&D 사업 천태만상 사례들이 공개됐다. 정부 R&D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이른바 ‘좀비기업’들과 이를 돕는 R&D 브로커 사례가 소개됐다.

동일 기업이 유사 주제의 R&D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주하는 사례도 소개됐다. 2015~2019년 5년 간 R&D 과제를 15회 이상 중복지원 받은 기업이 106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 기업은 2021년 기준 유사한 내용으로 11개의 과제를 동시 수행하고 있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R&D 예산이 중소기업 연명수단으로 전락했다”며 “지난 정부에서 R&D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과정에서 그릇된 관행이 발생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가 R&D 예산 규모는 2008년 10조원에서 2019년 20조원으로 늘어나는데 11년이 걸렸으나 이후 30조원까지 늘어나는 데 4년이 소요됐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관련 사례도 공개됐다. 현재 출연연이 전국에 세운 지역 분원이 약 100개에 이른다. 2010년 이후 세워진 출연연 지역 분원 중 타당성 조사를 거친 곳은 29개 중 10개 곳 뿐이다. 과기계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평가에서 53개 분원 중 우수 등급을 받은 곳이 4곳에 불과하다. 출연연 지역 분원이 지역수요나 필요보다는 정치인의 입맛에 따라 설치돼 지역혁신과는 거리가 먼 출장사무소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은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협의회에서 소개된 정부 R&D의 비효율 사례를 바로 잡으란 지시로 풀이된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당정협의를 통해 기관 간 칸막이를 낮춰 연구팀들 간 경쟁형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대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그러나 이날 발표에선 최근 20~30%의 출연연 예산 삭감에 대한 논의는 빠졌다. 출연연 모든 기관에 대한 천편일률적 예산 삭감에 대한 추진 배경이나 근거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과학계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관련 논란이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과기정통부는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이달 중 발표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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