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이성진 감독, 분노를 소재로 이렇게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다니…[서병기 콘텐츠톡톡]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화를 안내면 자신의 존재감이 침범 당한 것으로 여기는지, 사소한 일에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타인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이경규와 박명수 등 버럭 MC들이 화풀이 노하우를 방출하는 ‘나는 지금 화가 나있어’라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왔다.
‘맨 인 블랙박스’와 ‘한문철의 블랙박스’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운전중 사소한 사안에도 충돌하고 보복운전까지 한다. 분노조절장애를 줄여 ‘분조장’이라고 한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래도 웃어야 하는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짜웃음을 짓는다. 이른바 자본주의적 웃음이다. 에르메스~ 하고 웃는 연습을 한다. 드라마 ‘킹더랜드’에서는 구원(이준호)이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만 하는 천사랑(임윤아)의 웃음을 가짜, 거짓웃음이라고 봤다. ‘킹더랜드’는 이준호가 임윤아뿐 아니라 다른 호텔리어들에게도 진짜웃음을 찾게 해주는 ‘왕자’ 이야기다.
우리는 왜 성이 나있을까? 초연결사회는 연결이 잘돼 있지만 오히려 개인은 외롭고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전부 휴대폰 속으로만 들어간다. 조금만 건드려도 버럭 화를 낸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에서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재미교포 이성진 감독(41)은 일상적인 분노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비프 BEEP)을 공감가게 만들어 호평을 받고 있다. “분노는 일시적인 의식상태일 뿐”이라는 여주인공 에이미(앨리 윙)의 대사가 확 들어온다.
출연배우들도 스티브 연, 앨리 윙, 죠셉 리, 데이비드 최, 영 마지노, 에쉴리 박, 저스틴 민 등 한국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주축인 ‘성난 사람들’은 오는 9월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무려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아시아계 이야기의 드라마가 에미상 후보에 대거 오른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10부작인 ‘성난 사람들’은 돈을 벌어 한국에 있는 부모를 모셔와야 하지만 사업이 잘 안풀리는 한국계 노동자(도급업자)인 대니 조(스티븐 연)가 마트에서 차를 후진하자 강한 크락션을 울리고 손가락 욕까지 하는 흰색 벤츠 SUV 운전자인 중국계 이민자 에이미(앨리 웡)와 시비가 붙어 도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로드 레이지’.(도로위의 분노)
중국 중서부에서 소통을 잘 못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에이미는 고급식물 갤러리를 운영해 비싼 값에 팔아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돈이 안되는 예술을 하는 일본계 남편 조지 나카이(조셉 리)와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는 등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업가다.
코미디 장르물이어서 코믹한 이야기로 가볍게 즐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후반으로 가면 묵직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사람들의 분노로 인한 갈등과 해결을 담는다기 보다는 주연으로 나오는 한국계 미국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촛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이 이주민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의 고민과 적응기가 묻어나 있다. 이런 콘텐츠가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이성진 감독도 말했지만 “한국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된다”는 뜻이다. 한국계 미국인에게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한 대표적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이와 동시에 ‘성난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성난 사람들’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성진 감독은 16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23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특별 세션 〈‘성난 사람들’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에이터-글로벌 콘텐츠 시장속 아시아계 창작자들〉에 참가해 “‘성난 사람들’은 몇 년 전 내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신호대기중 초록색깔로 바뀐걸 빨리 보지 못하자 뒤에 있던 백인 운전자가 경적을 마구 울리고 소리를 지르고 난폭운전까지 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아시아계 사람들의 분노에서 시작된다. 감독님은 어떤 분노를 가지고 있는지? 극중 분노를 풀어가는 과정은 범죄도 있다. 감독님은 분노를 어떻게 표출하는지?
▶시리즈가 ‘로드 레이지’부터 시작한다. 이런 감정은 세계 어디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 생각한다. 10개의 에피소드로 확장할 수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주의하라는 교훈적 얘기다. 만약 분노를 계속 쌓아두기만 하고, 아무런 이해나 공감대 없이 분노만 표출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중간에 서로 이해 했다면 추가 에피소드는 필요 없을 것이다. 제 사견을 덧붙인다면, 우리가 좀 더 연결하는 데 포커스를 맞춘다면 분노의 감정이 수그러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도 분노가 심각하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장벽과 적응하기 힘든 요인은?
▶작가로서 제 개인적인 것만 가져온 것이다. ‘기생충’ ‘올드보이’가 훌륭하지만 저와는 다르다. 저와 스티브 연의 경험을 가지고 이 작품이 탄생했고, 인물 위주로 돌아간다. 그것으로 끝난다.
이 시리즈로 사회에 의미나 코멘트를 던지겠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스토리를 사회가 보게되고, 사회가 의미부여와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의 정체성 문제, 이민족과 화합할 수 있는 것과 화합할 수 없는 것들은 여러 언론인들이 다뤄줬으면 한다. 저는 데니와 에이미 속으로 들어가서 공감하고 실제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얘기가 현실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게 제 역할이다. 하지만 제 작품이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읽히고 있어 뿌듯하다.
-LA에 있는 NBC에서 알바로 글을 쓰기도 하면서 고생을 했을 것 같다. 창작자로 자리잡는 데 어려움을 없었나.
▶친구가 없어 TV만 봤다. TV가 친구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고 이사도 많이 다녔다. 그때마다 적응하는데 어려우니까 TV를 가까이 두고, TV속 인물과 스토리속에서 외롭지 않고, 자유롭다는 점을 느꼈다. NBC에서 TV와의 경험, 관계, TV에서 본 인물과 스토리 등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꿈을 쫓아갈 수 있었는지?
▶다른 건 많이 포기 했지만 글쓰기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내가 좋아한다. 노는 것을 왜 포기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지는 않는다. 나에겐 글을 포기하지 않은 건 쉬운 일이다.
-코미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코미디는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드라마, 스릴러와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코미디를 빼면 시청자가 줄어들고, 너무 넣으면 이상하게 흘러간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면 웃었다가 울었다가 겁에 질렸다가 여러 감정을 겪게 된다. 한국감독들은 여러 장르의 믹스를 잘한다. 미국도 요즘은 장르를 섞기도 하지만 드라마면 드라마, 코미디면 코미디였다.
-작품이 나간 이후 이성진 감독이라는 이름이 잘 나오고 있는지?
▶저는 ‘써니’라는 이름을 쓰면서 활동했다. 미국인들이 이성진이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진 발음을 잘하는 것 같다. 제 계획이 잘 먹힌 것 같다.
-‘김치찌개 끓여놓고 기다리는 한국 여자 만나’와 같은 대사는 어떻게 쓰게 됐나.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부모님은 아니었고 교회 친구나 친구의 삼촌 등으로부터 들어 탄생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에미상 후보에 오른 소감은? 한국계가 주축이 된 배우와 감독이 노미네이트 되기는 어려운 일인데.
▶후보된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 배우들도 열심히 했다. 코스튬 디자인도 인정받았다. 자부심이 생긴다. 더 많은 부분에서 후보로 올랐으면 했다. 에미상을 받는다는 말은 못한다. 징크스가 될 수도 있다. 아시아 배우와 크리에이터 팀이 만든 드라마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면, 10년 후에는 얼마나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올까를 생각하면 신난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회적인 분노가 더 커져가고 있는지?
▶‘성난 사람들’을 제작하면서 비대면 회의를 많이 했다. 기사들을 보면 팬데믹 기간에 ‘로드 레이지’가 무려 34% 늘어났다는 게 있다. 말도 안되는 분노를 쏟아내는 비디오들이 나오고 있다. 분노는 항상 있지만 팬데믹때에 더 많이 나온다.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가는 방향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블로그에 글을 오랫동안 올렸는데.
▶2003년 대학 졸업후부터 2009까지 글을 올렸다. 주로 TV 에피소드에 관한 글이다. 개인적으로 웃기는 얘기, 데이트를 했는데 재미 없고 별로였다는 소소한 얘기들이다. 이 글을 보고 방송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시즌2 계획은 있는가?
▶만약 분노에 대해 추가적으로 만든다면, ‘성난 사람들’을 통해 하고싶다. 시즌마다 새로운 ‘비프’, 새로운 종류의 ‘분노’를 만들어 분노시리즈로 이어나가고 싶다. 지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냐를 밝히기 어렵다. 작가조합이 파업중이어서 더욱 그렇다.
-회마다 시작할때 나오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서로 포옹하면서 상대에게 등에다 칼을 꽂고 있는 그림도 있더라.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권리를 사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9개의 그림을 넣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작으로 나오는 데이비드 최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그 친구가 자기 그림이 더 좋다면서 10년전부터 창고에 쌓아둔 많은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내가 골라 사용했다. 몇 개는 내가 주문한 것처럼 싱크로율이 100%다.
-제작사인 A24에 대해 말해달라
▶아티스트를 중시하는 회사다. 포텐셜을 보고 신뢰와 지지, 지원만 해줄뿐 간여하지 않는다. 아시아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회사인데, 위에는(높은 직책) 아시아 사람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회사.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을 발굴하는 회사다.
-한국에 온 기분을 말해달라
▶미국에서 중학교와 고교를 졸업했는데, 지금은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어릴때 먹던 음식을 먹으면서 그 기분이 살아난다. 금의환양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땅에 온 것 자체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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