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마지막 매미
매미 소리가 부쩍 잦아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서 규정한 주거지역 야간 소음 기준 60데시벨을 가뿐히 뛰어넘는 굉음으로 수백 마리가 사방에서 울어대 잠을 설쳤는데, 오늘 밤은 마지막 한 마리가 잔울음을 맥없이 내뱉다가 그마저도 개구리와 귀뚜라미 소리에 묻혀 들릴락 말락 한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드디어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울음을 멈춘 나머지 수매미들이 대부분 암매미를 만나 짝짓기에 성공했을 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끄저께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자료실에 폐기 대상 자료 목록이라는 게 올라와 있었다. 그중 한 도서관의 엑셀 파일을 열어 살펴보니 전체 폐기 대상 장서 5474권 중에서 ‘훼손’이 3703권, ‘분실’이 958권, ‘이용가치 상실’(최신성 결여)이 618권, 또 다른 ‘이용가치 상실’(미대출 5년 이상)이 195권이다. 마지막 매미 한 마리의 잔잔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폐기 대상 자료 목록의 마지막 항목을 떠올린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잔잔한 것은 삶이 만족스럽고 마음이 여유로워서가 아니다. 실은 악에 받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지만, 허기지고 기진맥진한 탓에 모깃소리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3~5년, 길게는 17년의 땅속 굼벵이 생활을 견디고 마침내 새 몸을 얻어 나무 위에 올라왔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추락하게 될 매미는 여러 달, 길게는 여러 해의 집필 및 편집 기간을 거쳐 마침내 종이옷으로 단장하고서 부푼 마음으로 도서관 서가에 자리 잡았는데 5년 동안 아무도 빌려가지 않아 먼지만 쌓인 채 파쇄될 책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까.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단편소설 <이세신궁 식년천궁>(<서왕모의 강림>에 수록)에 따르면 이세신궁에서는 내궁과 외궁의 모든 신사를 20년마다 새로 짓는다고 한다. “모든 것이 실로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같은 방식으로 지어져야 하는바, 이렇게 해야만 궁이 새로워지고 이렇게 해야만 탄생의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도서관에서 해마다 수천권의 장서를 폐기하는 것은 그래야만 수천권의 신간을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서관은 이세신궁과 달리 건물을 정기적으로 교체하지 않고서도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한다.
그러니 누구도 찾지 않는 책을 서가에 영영 꽂아둘 수는 없겠지만, 저 책들은 수술의 꽃가루를 받지 못한 채 떨어져버린 꽃처럼, 냉장고에 있다가 소비기한이 지나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두부처럼, 버킷리스트에 체크 표시를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신체와 정신이 낡아가는 나처럼 느껴진다. 엑셀 파일을 조금 들여다보다 만 것은 낯익은 책을 만날까봐 두려워서였다. 내가 번역한 책, 내 인생의 한 조각인 책이 마지막 매미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살아남은 책은 한시름 놓을 것이고, 짝짓기에 성공한 매미는 여한 없이 죽을 것이다. 이번주에 출간될 책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 나 또한 한동안 뿌듯할 것 같다. 그런데 살아남았다는 것은 또다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고 최종적 패배는 유예될 뿐 면제되지 않는다. 매미 소리가 완전히 그쳤다.
노승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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