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악의 스펙트럼
지은 지 40년 넘은 구축 아파트라 공간이 부족해 주차가 몹시 어렵다. 가급적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고, 피치 못하게 사용하더라도 주차하기 쉬운 시간에 맞춘다. 이사 나가는 집이 버리는 가구와 가전제품, 이사 들어오는 집이 가져오는 가전제품 상자를 통해 요즘 트렌드를 짐작한다. 초등학교가 단지 안에 있어 아이들의 성장 환경은 대부분 비슷하다. 길 하나로 마주 보는 신축 아파트와 신설될 도로 위치를 두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이후 도로 신설 계획이 유야무야돼 다툼도 흐지부지됐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동양대 교수는 2011년 펴낸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1인칭 시점으로 “신중산층이 나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내가 그들을 빚어냈다. 그들의 욕망은 내 피조물이었다”고 적었다. 1970~1980년대 정책 입안자들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에 따라 군사기지를 닮은 모양새”로 만든 아파트는 “대량 복제를 통한 특정한 주거 모델의 확산뿐만 아니라, 그 모델에 내재한 습속의 확산”까지 추구했다. 나는 위에 묘사된 서울의 구축 아파트에 십수년째 살면서, 그 아파트에 내재한 습속을 충실히 받아들였다.
상영 중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사진)는 박해천의 책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목과 달리 영화 속 서울은 갑작스러운 대지진 이후 디스토피아가 됐다. 대부분 주거지는 물론 도로·수도·전기 등 기반시설이 파괴됐지만 황궁아파트 한 동만큼은 간신히 무너지지 않았다. 엄동설한이기에 추위 피할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은 생존에 우위를 누린다.
황궁아파트는 1970~1980년대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다. “매매가 7억원쯤 되는 24평형(약 80㎡) 구축 아파트”라는 것이 제작진의 설정이다. 이웃의 신축 아파트인 드림 팰리스 주민들에겐 “학군 섞이기 싫다”고 무시를 당한 곳이지만, 육교 건너 빌라 주민에겐 20년 걸려 겨우 입주하는 선망의 주거지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얼떨결에 대표로 추대된 영탁을 중심으로 뭉친다. 갈 곳 없어 황궁으로 몰려온 다른 아파트 사람들부터 몰아낸다. 모든 일은 주민들의 투표와 회의를 거치는 만큼 ‘민주적 의사결정’이라는 외양을 띠지만, 황궁아파트 공동체는 점점 파시즘 독재국가를 닮아간다.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부르는 것은 유대인을 기생충이라 부른 나치, 르완다 내전 당시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학살했던 후투족을 연상케 한다. 물자를 구하기 위한 원정에서 영탁은 살인까지 저지른다. 영탁은 “우리가 뭘 하든 죄책감 가질 것도 없고 자부심 가질 것도 없다. 우린 지금 당연한 거 하고 있으니까. 가장이 가족 지키는 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영탁은 악당인가. 엄태화 감독과 주연 이병헌 배우의 말을 종합하면 제작진은 영탁을 ‘사연 있는 악당’으로 설정했다. 영탁은 모임 뒤에서 조용히 귤 까먹는 사람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적극적으로 체화하며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된다.
황궁 주민들의 행동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낳는다. 극한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연민, 인간성, 염치를 간직했던 간호사 명화는 주민들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제는 다소 식상해지기까지 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피해자의 안타까운 사연 대신 가해자의 신상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미디어를 두고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영탁이 주인공인 만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악인의 서사’다. 평론가 강덕구는 <악인의 서사>에서 “악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 행위는 공동선과 윤리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명화와 소수 주민이 보여주는 선은 영탁과 다수 주민의 악을 통해 더욱 고귀하고 선명해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악의 스펙트럼에 놓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인들이 부지불식간 깊숙하게 젖어 있는 아파트의 습속을 돌아보게 한다.
백승찬 문화부장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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