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상온상압 초전도체 주장이 최근 큰 관심을 끌었다. 여러 그룹에서 시료를 제작해 실험하기도 했다. 현재 초전도체가 아닌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로 살다보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결과가 큰 관심을 끌면, 여러 연구그룹이 재현실험을 시도하고, 설명하는 이론을 제안하기도 한다. 전에 들은 농담이다. 이론물리학자는 자기 이론만 믿고, 실험물리학자는 심지어 자기 실험도 믿지 않는다는 농담이다. 농담이지만 학계에 만연한 건강한 회의(懷疑)의 풍토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과학자는 늘 의심하는 것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이다. 긴 세월 회의와 검증의 시간을 꿋꿋이 견딘 것들이 모여 과학의 토대가 되고, 튼튼한 바닥이 최근의 논문을 의심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방금 출판된 결과를 진실이라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어서, “재밌군.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어” 정도로 받아들인다. 검토와 회의, 비판과 재현의 과정이 이어지면서, 처음 결과가 굳건한 사실로 학계에 받아들여져 토대에 편입되기도 하고, 회의의 체에 걸러져 과학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한다. 튼튼한 과학의 나무는 회의를 양분 삼아 조금씩 천천히 자란다.
과학자도 사람이어서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충실하고 솔직하게 결과를 보고했다면, 딱히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물론, 고의로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지 않은 실험을 한 것처럼 속인 논문은 다른 문제다. 학계의 신뢰를 크게 잃어 이 연구자의 이후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기 어려워져, 학계에서 방출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처럼 작동하는 자정의 힘은 상당히 크다. 누가 면밀히 조사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도 대부분 과학자는 논문에 거짓을 담지 않아서, 다른 이의 논문을 일단 믿고 보는 것이 가능한 문화가 정착되었다. 고의적인 조작은 상호신뢰의 관행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나쁜 부정행위다. “다들 일단 믿어줄 테니 데이터를 좀 바꾼들 누가 알까”의 마음이 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무도 믿지 못하면 과학은 없다.
연구결과는 주로 동료 평가를 거친 논문으로 공개된다. 논문이 투고되면 학술지 편집자는 같은 분야의 과학자를 두세 명 선정해 심사를 맡긴다.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출판이 단박에 결정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익명의 심사자와 논문 투고자 사이에 비평과 답변이 오가며 논의가 보강되고 결과가 충실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심사를 통과해 출판되었다고 해서, 모든 과학자가 논문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식 출판된 논문 중에도 가치가 없는 것이 많고, 후속 연구로 논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제법 발생한다. 심사를 거쳐 출판되었다는 것은, 논문이 학계에 공개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했다는 정도의 의미다. 연구의 가치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학회와 논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인용하며, 논문에 기대어 많은 후속연구가 이어지면서,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중요한 논문과 훌륭한 연구자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다.
논문이 출판되기까지는 짧아도 몇달 정도가 걸린다. 공개 시점을 훌쩍 앞당기는 방법이 있다. 바로, 이번의 초전도 논문 같은 경우다. 동료 평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게 출판 전 온라인에 공개되는 논문을 프리프린트(preprint)라고 한다. 물리학 분야의 프리프린트는 주로 아카이브(arXiv)에 공개된다. 출판 이후에 논문을 아카이브에 올리는 학자도, 논문을 전혀 올리지 않는 학자도 많다. 또, 투고 전 학계의 반응을 미리 살펴 정식 투고 논문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프리프린트를 미리 공개하는 학자도 많다. 완결된 것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결과를 모아 프리프린트를 아카이브에 올리는 것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이번 상온상압 초전도 프리프린트도, 다른 저자의 동의 등 다른 문제가 없다면, 아카이브에 먼저 공개한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완성도가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카이브는 원래 그런 논문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대다수 연구자는 프리프린트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엉성한 논문을 섣불리 공개하면 본인의 평판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프리프린트는 완성도의 문제도 있지만, 초전도체라면 꼭 보여야 하는 특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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