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물난리 용산 이촌동에 울렸던 부르짖음

2023. 8. 1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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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해마다 여름 장마 때 한강 물 넘쳐 참상 서해안, 폭우·해일에 2천여호 침수 피해 민우회 등 18개 단체, 임시 구제회 조직 직업 불문하고 이재민 구호한 조선 사회

2023년 여름, 우리는 심각한 기상이변을 겪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폭우·폭염에 태풍까지 몰아닥쳐 피해가 컸다. 자연재해는 비단 올해만의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심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우려감을 키운다. 100년 전 여름 자연재해는 어떠했을까? 그 때 모습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1923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매년 홍수에 우는 서부이촌동 3,500명의 부르짖음'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촌동(二村洞)! 매년 여름마다 장마만 들면 한강 물이 넘쳐서 제일 무참한 피해를 당하는 물나라 이촌동의 인민은 참다 못하여 '우리도 살려주시요'하는 부르짖음을 내치고 경성 부윤에게 제방을 쌓아 달라는 탄원을 하였다. (중략) 더욱이 3년 전 큰 홍수가 있을 때에는 500호나 되는 온 동리가 모조리 물속에 들어서 구호(救護)를 하러 나갔던 동아일보사 구호반도 속절없이 돌아와 '생사(生死) 존몰(存沒)을 알지 못하는 이촌동의 참상'이라는 눈물을 대신한 비참한 보도를 하게 된 일도 있었다. (중략) 이촌동 구석이나마 떠나서는 다시 몸을 붙일 곳을 얻을 수 없는 빈한한 사람들이다. 그러하므로 해마다 가슴을 놀라게 하는 두려운 물난리를 만나고 번번이 몸서리가 나는 괴질 난리를 만나면서도 이 동리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8월 2일자에도 '기세가 무섭던 경기 지방 폭우'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7월 31일 아침부터 검은 구름이 쉬지 않고 떠돌더니 어제 8월 1일 새벽부터 경성에는 경성측후소가 생긴 이래로 처음 보는 폭우가 내렸다. (중략) 골목마다 큰 하수구 작은 하수구를 물론하고 거의 넘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지형이 얕은 곳에는 물이 아니 든 집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거의 전 경성 시가는 물난리를 만난 듯 하였는데, (중략) 폭우로 인하여 전신(電信)이 일시 불통되었으며, 정전으로 인하여 어제 1일 오전 9시 45분부터 동 11시 5분까지 경성의 전차는 불통되었으므로, 비가 내리 퍼붓는 시내의 교통은 참으로 불편하였는데 원인은 종로변압소의 기계에 고장이 있은 까닭이라더라."

폭우는 경성과 경기도 뿐만 아니라 평양과 서선(西鮮)지방도 타격했다. 1923년 8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일시 그쳤던 평양의 폭우는 2일 오후 4시부터 다시 시작되어 3일 오후까지 퍼붓는 중인데, 1일 폭우로 평양 지방의 피해는 실로 개벽(開闢)이래 처음 되는 참상으로 시내의 침수 가옥이 10,430호, 유실 가옥이 11호, 무너진 가옥이 100호, 생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5명, 죽은 사람이 8명, 경상을 당한 사람이 3명이요, (중략)"

그 해에는 한반도 서해안 쪽이 폭우와 해일로 인해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선 순식간에 2천여호가 침수됐고 유실된 가옥이 600여호에 달했다. 평안북도 용천군에선 사망자 500여명, 실종자 691명을 기록했으며 유실된 가옥은 1800여호에 달했다.

이에 이재민 구호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3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는 '18개 단체가 모여 수해구제회 발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를 보도했다. "이번 전 조선 각처에서는 막대한 수해로 차마 보고 듣지 못할 곤경에 빠진 데에 대하여 경성에서도 이에 대한 구제책을 연구하기 위하여 우선 민우회(民友會) 등 18개 단체가 임시구제회를 조직하고, (중략)"

이 중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편창(片倉)제사방적 주식회사 대구 제사소의 남녀 직공들은 푼푼이 모았던 돈을 서로 모았다. 총 24원을 모아 동아일보 평양지국으로 보냈다. 형무소 노역금을 보낸 사례도 있었다. "12일에 평양형무소에서 제령 위반으로 철장 생활을 하다가 출옥이 된, 평안남도 덕천면 읍내 청년 회원인 이종현(李宗鉉)씨가 재감(在監) 중 노역금(勞役金)으로 3원 60전을 벌었는데, 그 중에 2원은 평양 수해구제회에 동정하고 그 잔액은 귀향 여비에 보충하겠다 한다." (1923년 8월 15일자 매일신보)

구제금을 거두기 위해 직접 수레를 끌고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아다닌다는 기사도 보인다. "시내 인사동의 한 청년회에서는 8월 21일 오후 2시부터 구루마를 끌고 나섰는데, 한 대에 다섯 사람씩 두 대에 나누어 가급적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할 터인데, (중략) 불과 몇 시간 아니 되어 현금으로 219원 50전이 수입되고 기타 의복 3벌과 백목(白木, 무명) 한 필과 공책 24권과 백미 7되가 수입되었는데, (중략)" (1922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딴스 대회'도 열렸다. "수해 참상을 당한 서관(西關) 동포를 위하여 시내 서대문정에 있는 예술학원 주최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8월 10일 오후 8시 중앙청년회관에서 남녀 연합 딴쓰 대회가 열렸다." (1923년 8월 12일자 조선일보)

해외동포 역시 수해 구제에 참여했다. "합이빈(哈爾濱, 하얼빈) 기독교 감리교회 발기로 구취(鳩聚)된 금액이 173원 50전에 달하였는데, (중략) 상해(上海)에 있는 동포들도 김구(金九), 이유필(李裕弼), 조상섭(曺尙燮)씨 등 수십명이 지난 22일 오후 8시에 상해 독립신문사 안에서 제1회 발기회를 열고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기로 했다 한다" (1923년 9월 1일자 조선일보)

1923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천유불측풍우(天有不測風雨) 인유조석화복(人有朝夕禍福)이라는 말이 있지마는 어찌 이같은 불측의 풍우가 있어 일조에 화근을 당할 줄을 누가 뜻하였으리요. (중략) 독립운동 때에도 무수한 생명이 희생에 바친 자가 적지 아니한 끝에 또 비상히 참혹한 경우에 빠졌도다. 경향 각처를 물론하고 재산가이든지 실업가이든지 기타 유지한 여러 동포들은 힘있는 대로 능력 미치는 대로 다 각기 활동하여 죽어가는 동포를 하루바삐 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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