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요? 제가요? 왜요?"… 잼버리 지원 요청에 "강제동원" 반발

김정환 기자(flame@mk.co.kr), 이진한 기자(mystic2j@mk.co.kr), 이희조 기자(love@mk.co.kr) 2023. 8. 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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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부처부터 지자체까지 … 무사안일 공직사회 백태
지난달 물난리 현장 투입에
"박봉도 억울한데 노예로 봐"
비위공무원 5년간 1603명
고위관료 만취운전 적발도
"업무부담 주면 갑질로 신고"
"희생 감수할 필요 없다" 43%

지난달 경상북도 예천군 등 중부지방에 물난리가 한창일 때 공무원 익명 게시판에는 '박봉도 억울한데 국민이 공무원을 노예로 본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사태 때 공무원 동원 논란도 도마에 올랐다. 정부가 '잼버리조직위원회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등에 행정·재정적 협조 지원을 요청할 수 있고, 해당 기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최대한 협조한다'는 잼버리 특별법에 근거해 지원을 요청했지만 공무원들이 "공무원 업무가 아닌데 강제 동원됐다"며 반발한 것이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초석을 쌓는 데 기여했고 역대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공직사회가 최근 들어 '무사 안일주의'에 흔들리고 있다. 일선 지자체나 공기업까지 범위를 넓히면 공직 기강 해이는 더욱 심각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잼버리 사태, 호우 피해 대응 등 리스크 관리 역량이 필요했던 사건·사고 국면에서 허술해진 공직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통령까지 나서 무사 안일주의에 일침을 놨다. 윤석열 대통령은 수해가 심했던 지난달 1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국민 안전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집중호우가 올 때 사무실에 앉아만 있지 말고 현장에 나가 상황을 둘러보고 미리미리 대처하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한 광역자치단체 서기관은 "업무에 부담을 주면 거꾸로 상사 갑질로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며 "자기 업무 여부를 너무 철저하게 따지는 바람에 요즘 부서장은 업무 분장을 세밀하게 짠다"고 토로했다.

더 큰 문제는 기강해이가 핵심 중앙부처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급을 요하는 사안이 생겼을 때도 서로 네 탓만 하며 업무를 떠넘기려는 흐름이 강해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부처 고위 관료는 "국회 토론회 준비로 바쁜 시기에 한 사무관에게 유인물 제작 등 사전 작업을 지시했는데 당일까지도 준비를 안 해 직접 급조한 경험이 있다"며 "'자료 준비는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책 부처 실무 관료는 "이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후폭풍으로 일부 공무원이 송사에 휩쓸리면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중요한 보고서에 자기 이름을 빼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처럼 경직된 조직 문화는 정부 경쟁력을 깎아먹고 있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올해 각국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 한국 정부 효율성은 지난해 36위에서 38위로 하락했다. 한국 정부 효율성은 2018년만 해도 29위였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올해는 특히 관료주의 부문(57위→60위)에서 하락이 심해지며 전체 순위를 끌어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최근에는 공직자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잊다보니 각종 사고를 자행하거나 항명 사태로 번지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2018~2022년 비위를 저지른 중앙·지방정부 공직자는 총 1603명으로 조사됐다. 부적절한 업무로 법률을 위반한 경우가 67%로 대다수였고 금품수수(13.5%), 성비위·음주 등 품위 손상(8.2%) 등도 적지 않았다.

최근 국무조정실 소속 한 2급 공무원은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시민 신고로 경찰에 입건됐고, 인천시 한 6급 공무원은 정당 현수막 철거 업무 지시에 불응해 일선 행정복지센터에 무보직으로 발령이 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세종 관가를 등지고 핵심 관료들이 잇따라 민간으로 이직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한 경제부처 고위 관료는 "능력 있는 공무원이 성과주의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고 관료 체계에서 똑같이 대접받다 보니 유능한 인재는 민간으로 나가고, 능력 없는 공무원만 남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조직 전문가들은 공직 기강 정립과 더불어 △전문성 없는 순환보직 체계 개편 △전문성 육성을 위한 직제 개편 △적극 행정에 파격적인 인센티브 도입 등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산업화 시대에는 머리 좋은 인재만 뽑으면 선두주자를 쫓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영입해야 할 때"라며 "호봉제를 직무급제로 전환하고 민간의 우수한 인력이 유입될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진혁 충남대 교수는 "이제 '무조건 하라'는 식의 명령은 잘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며 "공직사회도 타당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관리 체계가 필요하며 젊은 공무원들에게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공직자로서의 가치를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환 기자 / 이진한 기자 / 이희조 기자 / 서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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