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남았는데 출품작 합의 못해…‘김구림 회고전’ 엎어질라
큰 전시가 곧 시작되는데 나올 작품이 확정되지 않았다. 작가와 미술관 사이에 여태껏 출품작이 합의되지 않고 논란만 벌이다 작품 진열도 하지 못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오는 24일 개막할 예정이던 1970년대 한국실험미술 대가 김구림(87)씨의 대형 회고전이 작가와 미술관 사이의 출품작 갈등으로 인해 엎어질 위기에 놓였다. 16일 미술관과 김 작가의 말을 종합하면, 김 작가는 올 상반기 전시 준비 과정에서 자신의 실험미술 대표작으로 꼽히는 가스 파이프 설치 작업과 얼음이 녹는 과정을 보여주는 수조 설치작업, 미술관 건물을 천으로 묶는 대형 설치작업 등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미술관 쪽은 건물 안전 관련 법규와 촉박한 준비 기간 등을 들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김 작가는 이와 관련해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가스 설치작업과 얼음 작업은 양보하더라도 건물을 묶는 설치작업은 일부라도 꼭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마저도 수용되지 않았다”면서 “이번 주 초 미술관 상부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실장에게 왜 작가가 꼭 원하는 작품을 전시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제약만 하느냐는 내용의 항의 글을 보냈다”고 밝혔다.
작가가 공개한 항의 글에서 “몇십년 간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이때까지 일반 화랑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발표할 때 아무런 제약을 받은 적이 없는데 국익을 위해 작가를 도와주고 세계적으로 알려야 할 미술관에서 이렇게 제약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미술관에 천을 둘러 묶는 자신의 작품 설치가 최종적인 요구조건이라면서 미술관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방관할 경우 전시를 철회할 수밖에 없으며 장관한테도 직접 전시 파행의 책임을 따지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미술관 학예실 쪽의 주장은 다르다. 지난 2월부터 담당 우현정 학예사와 유지연 현대미술1과장이 작가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하면서 얼음과 가스 작품의 축소 또는 하지 않는 것으로 작가와 합의했으나 현재 김 작가가 요구하는 미술관 천 묶기 설치작품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지연 과장은 “미술관을 천으로 묶는 구상은 작가가 지난 6월 제안한 것”이라면서 “서울관 건물이 근대 문화유산 건물이어서 외벽에 천을 두를 경우 종로구청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야하며 건물 구조상 가능할지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최소한 1~2년 걸리는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미술관 해명과는 별개로 전시 개막을 코앞에 두고 작가와 출품작 합의가 안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미술계 전문가들은 지적이다. 국립미술관 학예직에서 일했던 한 기획자는 “국립미술관 같은 국가대표 미술관 전시의 경우 통상 회고전이나 기획전은 아무리 늦어도 3개월 전에는 출품작 리스트를 포함한 기본 개최계획이 확정되어야 하는 것이 철칙인데 전시가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출품작 논란을 벌이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김 작가도 “출품작 구상을 지난해 원래 담당 큐레이터에게 모두 알렸는데도 미술관 쪽이 딴 변명을 한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이 전시는 지난해 개최가 확정되고 올해 1월초 윤범모 관장 시절 주요 전시로 언론 설명회까지 연 바 있다.
미술관 쪽은 올봄에 담당 학예사가 그만두는 바람에 새 학예사로 교체되고 현대미술전시1과장이 후견인처럼 전시 준비를 주도하면서 작가와 협의를 지속해온 상황이라고 전했다. 관장과 학예실장이 모두 공석인 상황에서 원만한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개막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도 출품작 목록을 확정하지 못하는 파행이 벌어진 셈이다. 한 중견 미술평론가는 “사령탑 부재의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을 두고 우려 목소리가 높았는데, 그 파행상이 이번 김구림 회고전 출품작 갈등으로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이라고 짚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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