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이야기, 지옥 훈련장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여러 조건 중에 스토리 디자이너로서 내가 가장 매달리는 것은 딜레마와 아이러니다. 한 문학가는 인간이 이야기에 매료되는 이유가 그것이 지옥 친화적이기 때문이라 했는데, 지옥 창조의 필수 재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와 '이것도 뜻대로 안 되고, 저것도 기대를 저버리는' 아이러니기 때문이다.
딜레마란 무엇인가. 당신에게는 다른 대안 없이 A와 B, 두개의 선택지만 있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 무엇을 택해도 비극적 결과가 예견되는 상황. 게다가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 조금이라도 덜 괴로울까 한낱 희망을 갖고 택한 하나가, 기대와 예상을 무참히 저버리고 정반대 결과로 돌려주는 아이러니까지 겹친다면, 이게 지옥이 아닐까.
얼마 전 본 영화에도 예외 없이 지옥이 있었다. 기후위기와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남겨진 아파트 하나. 추위, 배고픔, 연속된 재난에도 자비와 동정을 베풀어 외부 생존자들을 품자니, 나와 내 가족이 죽을 것만 같다. 궁지에 몰린 아파트 주민들은 사지로 쫓아낼 남과, 살려야 할 우리 사이에 경계를 긋기로 한다. 흥행 작품답게, 잘 만든 지옥에 걸맞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며, 결말부엔 예측을 벗어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를 나누는 백만 가지 기준이 등장했고, 그 기준들은 잠시 꽤 합리적인 기능을 수행하지만, 다시 우리라는 이름 아래 쪼개지고, 변질돼버린다. 덕분에, 영화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보는 내내 결코 천국이 고향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은 현실에선 볼 일 없기를 기도하며, 허구로 만든 지옥을 탐험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야기 세계의 혹독함에 밀리지 않는 아픈 선택을 끝없이 요구한다. 요즘 뉴스는 영화나 소설이 순한 맛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고,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세상에 대비할 방법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인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지옥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인간은 사랑과 미움, 추앙과 편견, 나와 너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깨달을 수 있고, 다른 이가 처한 상황을 깊게 느끼는 기회도 갖기 때문이다. 여러 유형의 인간이 드러내는 무한 조합의 선택을 관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운이 머무는 동안, 존엄한 목적 자체이자, 모호하고 오락가락하는 존재인 인간을 잠정 정의해 보고, 끝까지 피하고 싶은 바닥에 대해서도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도 마련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찾고 창조하는 으뜸 이유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고통을 제대로 보고, 돌파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다.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 내가 마주하는 괴로움은 나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밝히는 증거다. 세상 곳곳 사건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려도 무덤덤하거나, 하나 고르기가 쉽고 뻔하게 느껴진다면, 그때야말로 내 인간다움에 진지한 의심을 품어야 한다. 딜레마와 아이러니는 인간다운 인간의 그림자다. 모든 인간에겐 그것을 다루고, 견디고, 극복하는 이야기라는 지옥 훈련장이 꼭 필요하다.
[권보연 인터랙티브 스토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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