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서 배운 블랙코미디 美서도 통해요"
올해 에미상 13개부문 후보
한국계 감독 이성진 인터뷰
이성진. 이 이름을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올해 4월 공개된 넷플릭스의 화제작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을 기획·제작한 감독 겸 작가다.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에서 5주 동안 톱10에 들었고, 최근 공개된 에미상 후보 총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린 대히트작이다. 일상 속 분노에서 비롯된 도급업자 대니(스티븐 연)와 사업가 에이미(앨리 웡)의 난폭 운전이 악연으로 얽히면서 일파만파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치닫는 블랙코미디 드라마다. beef는 영어로 소고기 외에 '불평하다' '싸우다'란 의미도 있다.
탁월한 상상력을 갖고 혜성처럼 등장한 이 한국계 창작자는 이미 2008년 미국 시트콤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의 방송작가로 데뷔해 활동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직접 지은 미국식 이름 '소니 리(Sonny Lee)'를 썼다. 학창 시절 출석 부를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살 때 '성진'이란 이름이 제대로 읽히지 않고 때론 웃음거리가 되는 게 부끄러웠단다. 그러다 이름을 되찾은 건 2019년 영화 '기생충'이 계기가 됐다. "저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따라했어요. 내가 내 자신이 되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지 못했죠. 그러다 영화 '기생충'이 나왔는데, 미국인들이 봉준호·박찬욱 등의 이름을 말할 땐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하더군요. 그때야 한국식 이름에 자부심을 느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작품을 만들면 더 이상 내 이름을 듣고도 웃지 않겠구나, 훌륭한 걸 만든 사람의 이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16일 서울 코엑스 국제방송영상마켓 현장에서 매일경제와 만난 이 감독은 "작품 이후로는 이름이 잘 불리고 있다"며 "계획이 성공한 셈"이라고 웃어 보였다. 총 10부작인 '성난 사람들'엔 한국식으로 성, 이름 순서로 적힌 그의 이름이 매회 대문짝만하게 나온다. 그는 "제가 데뷔했을 땐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가 거의 없었다. 불과 5~10년 전이었다면 '성난 사람들'이 만들어지거나 받아들여지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데뷔 초엔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게 뭘지, 사람들이 날 싫어하진 않을지 걱정했어요. 그런데 이젠 다양성 개념이 생겼고,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한국의 정체성, 진정 어린 경험을 듣고 싶어해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도 멋진 스토리를 만들 수 있고, 세계에 받아들여집니다."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 난폭 운전이나 한인 교회 등 많은 소재가 이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다. 미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콘텐츠다. 여기엔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을 비롯한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도 반영됐다. 어떤 차별적 시선도 없이 온전히 이민 2세의 경험과 고민을 다층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올드보이' '기생충' 등은 정말 훌륭한 작품이지만 제 경험과는 또 다른 부분이 있어요. 작가로서 저는 제가 아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기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입장이 돼서 상상하는 것이죠. 그런 이야기가 끝내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읽힌다는 것도 뿌듯한 현상입니다."
극 중 코미디의 활용도 탁월했는데, 영화 '살인의 추억' '복수는 나의 것' 등 한국 작품을 레퍼런스로 꼽았다.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어두운 내용이지만 많이 웃기기도 하죠. 한국 감독들은 이렇게 장르를 섞는 걸 훌륭하게 잘해왔어요. 너무 웃기거나 진지하기만 하면 시청자에게 닿기 힘들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즌2도 기대해봄 직하다. 이 감독은 이날 행사에서 제작사에 작품 기획을 소개한 화상회의 영상 일부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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