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만 당하는 독일” 장관 순방 중 관용기 고장으로 일정 취소
정부 지출 ↑… 23년 운항한 기체
언론들 “되는 것 없다” “쇠락 보여줘”
독일 외교장관이 정부 관용기 고장으로 인도·태평양 순방을 취소하면서 독일 여론이 들끓고 있다. “되는 일이 없다”는 자조 섞인 반응마저 나온다.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 등 독일 언론들은 15일(현지시간)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이 정부 관용기가 이틀 동안 두 차례나 고장나면서 인도·태평양 순방을 취소했다고 전했다.
베어보크 장관은 일주일 일정으로 호주, 뉴질랜드, 피지 등을 방문하기 위해 정부 관용기인 에어버스 A340을 타고 지난 14일 중간 기착지인 아랍에미리트(UAE)의 수도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이 항공기는 14일과 15일 각기 한 차례씩 출발을 시도했으나 착륙용 보조 날개가 고장 나 두 번 모두 회항했다. 두 번째 회항 때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연료 저장고의 석유 80t을 버렸다. 베어보크 장관은 일반 항공편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순방을 중단했다.
독일 외교부 대변인은 “안타깝게도 고장 난 정부 항공기 대신 다른 수단을 활용해 인도·태평양 순방 방문 예정지에 계획대로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베어보크 장관도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고장 난 정부 관용기 없이 인도·태평양 지역 순방을 계속하는 것은 동선상 불가능하다”면서 “화 나는 것 이상의 일”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 관용기 고장으로 고위 관료들의 출장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고장이 잦은 이유로 독일 정부의 중고 항공기 구매 정책을 지목한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관용기는 운항한 지 23년 된 기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어보크 장관은 지난 5월에도 관용기를 탔다가 고장 때문에 발이 묶인 적이 있다. 올라프 숄츠 총리 역시 재무장관을 지내던 2018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 회의 참석을 위해 관용기를 탔다가 설치류가 비행기 케이블을 갉아먹는 바람에 인도네시아에 불시 착륙한 바 있다. 같은해 11월에는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와 숄츠 장관이 탄 관용기가 무선 제어기 고장을 일으켜 독일로 회항했다. 두 사람은 결국 민간 항공기를 타고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언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비판을 쏟아냈다.
보수우파 신문 빌트는 “독일 시민으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단 하루도 독일이 망신을 당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다”고 비판했다. 중도좌파 주간지 슈피겔은 “외교장관이 탄 비행기가 고장으로 이륙하지 못한 것은 ‘이 나라에서는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면서 “국가의 쇠락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중도우파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쓸데 없이 연료를 허비했다”고 지적했다.
빌트는 “난민의 숫자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정부 지출도 늘어나고 있다”면서 “경찰, 교사, 아파트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부족하고 사방에 걱정거리가 널려 있다”고 지적했다. 슈피겔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차가 자주 연착한다는 것이 주된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에너지 공급, 항공편, 도로와 교량, 학교와 보건 시스템 등 사회 인프라 전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고 최근에는 여자 축구대표팀마저 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독일 언론의 격렬한 반응은 최근 독일 경제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이 주요 7개국 중 유일하게 독일이 역성장(-0.3%)할 것으로 예측하는 등 독일에서는 성장 동력 소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공급 차질로 전기 요금이 10배 상승해 가계에 부담을 줬고,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경기 불황으로 자동차 등 독일 제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 도이체벨레(dw)는 지난 1일 전문가들 사이에서 독일 경제의 미래가 어두워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면서 2000년대 초반 ‘유럽의 병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독일 경제가 또다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전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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