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숙성은 더 이상 '이슈' 아냐… 첫날부터 맛있어야 좋은 와인"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편견'을 뛰어넘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과정은 어린 카베르네 소비뇽만큼이나 떫고도 거칠게 마련입니다.
칠레 와인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무너뜨린 에라주리즈의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 최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칠레 와인의 '미래'를 한국 소비자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칠레 와인의 '과거'를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채드윅 회장은 에라주리즈 와이너리 창업자 '돈 막시미아노 에라수리스'의 5대손입니다. 에라수리스(Errazuriz)는 칠레 대통령 4명을 배출하며 '칠레의 케네디 가문'으로 불리는 명문 가문입니다. 외래어 표기법으론 '에라수리스'지만 와인과 관련해선 제품명인 '에라주리즈'로 표기합니다. 채드윅(Chadwick)도 '차드윅'으로 써야 맞습니다. 이 역시 와인이야기 독자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제품명 '채드윅'으로 통일합니다.
채드윅 회장은 2004년 '베를린 테이스팅'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돌며 블라인드 테이스팅 심사를 통해 칠레 와인을 '프리미엄'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입니다.
인터뷰 이후 주말 동안 그가 2016년 발간한 '더 베를린 테이스팅(The Berlin Tasting)'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칠레 와인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도전과 용기, 또 미래를 향한 비전에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책에는 채드윅 회장이 베를린 테이스팅을 시작한 이유가 담담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우리 와인을 알리기 위해 모든 방식을 동원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여전히 칠레 브랜드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의 좌절이 느껴집니다. 2000년대 초반 칠레 와인은 '값싼 와인'(affordable wine)이란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때 채드윅 회장은 1976년 '파리의 심판'을 떠올립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와인 브랜드를 가린 채 시음하는 방식)을 통해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을 전 세계에 알렸던 것처럼 칠레 와인을 평가받자는 것이지요.
그는 '파리의 심판'을 기획한 스티븐 스퍼리어와 함께 2004년 베를린에서 시음행사를 준비합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는 칠레 에라주리즈의 프리미엄 와인을 포함해 프랑스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라피트 로칠드 등 보르도 1등급 그랑크뤼와 이탈리아의 3대 와인으로 불리는 솔라이아(Solaia), 사시카이아(Sassicaia), 티냐넬로(Tignanello) 등 16종의 와인이 등장합니다.
상위 10등까지 결과를 발표했는데 에라주리즈의 비네도 채드윅이 1위. 이외에도 돈 막시미아노, 세냐 등 에라주리즈 와인이 10위 안에 5개나 들어갑니다.
하지만 칠레 와인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합니다. 평론가들은 칠레 와인이 최고급 와인의 핵심 자질인 '숙성 잠재력'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2004년 베를린 테이스팅에 나온 와인들은 2000년, 2001년 빈티지의 어린 와인들입니다.
채드윅 회장은 책에서 "우리 와인이 최고급 보르도나 슈퍼 투스칸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우아하게 숙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만 했다"고 적었습니다.
이후 2011년부터는 다양한 빈티지의 '세냐' 와인과 1995년, 2005년 빈티지의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 와인과 비교하는 '버티컬 테이스팅'을 진행합니다. '세냐'의 버티컬 테이스팅은 한국계 마스터 오브 와인 '지니 조 리'와 함께 진행했습니다. 지니 조 리 마스터와 채드윅 회장은 함께 마스터 오브 와인을 공부했습니다.
세냐 와인은 2011년 홍콩, 서울, 타이베이, 2012년 런던, 취리히, 상하이 등에서 열린 버티컬 테이스팅에서도 1등을 차지했습니다.
2013년 6월 7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서 열린 테이스팅 행사에선 에라주리즈의 또 다른 와인 돈 막시미아노 2009가 샤토 마고, 샤토 라필드 로칠드, 사토 라투르 등을 제치고 1위에 오릅니다. 이후 돈 막시미아노 2016년 빈티지가 대한항공 1등석 와인에 선정됩니다.
채드윅 회장은 "각 지역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한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돈 막시미아노를 추천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저는 채드윅 회장에게 칠레 와인의 '미래'와 '장기 숙성 가능성'에 관해 '또' 물었습니다 .
채드윅 회장은 '비네도 채드윅 2014'를 칠레 와인의 '미래'라고 소개했습니다. '비네도 채드윅 2014'는 채드윅 회장의 아버지 알폰소 채드윅 에라수리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와인입니다.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았습니다. 칠레 와인 최초의 100점 와인입니다.
이날 시음한 '비네도 채드윅 2014'는 입안을 꽉 채우는 풍성한 질감과 함께 산도, 타닌, 향 등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균형 잡힌 와인이었습니다. 오래 보관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코르크를 따서 마셔도 너무 좋은 와인입니다.
채드윅 회장은 "장기 숙성은 더 이상 와인업계의 이슈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의 주장에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냉장 물류와 유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와인이 전 세계로 이동하려면 숙성기간이 긴 와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가 셰리 와인이나 포트 와인 같은 주정강화 와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냉장 물류(콜드체인)가 보편화되고 와인 애호가 집에 와인 셀러가 갖춰진 상태에서 '보관'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와인의 '산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장기 유통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채드윅 회장은 "40년 전에 와인을 만들면 첫날은 마시기 힘든 수준이었다. 산도가 너무 높았다. 숙성 잠재력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고의 와인은 만들어진 첫날부터 마시기에 좋은 와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월이 빚어내는 질감과 복합미가 풍부한 맛있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2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는 기자도 공감합니다. 이런 '조기 숙성'은 칠레 와인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칠레 와인의 맛있는 기간이 2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을지는 다른 이슈입니다.
채드윅 회장이 로버트 몬다비와 함께 만든 '세냐'의 첫 빈티지는 1995년입니다. 2011~2012년 진행된 '버티컬 테이스팅'에서 3~4년 된 세냐 와인이 1등을 차지하며 '조기 숙성'에 대한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입증했습니다. 더구나 비교 대상은 20년 가까이 된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 와인입니다.
비네도 채드윅 2014처럼 최고급 칠레 와인이 지금처럼 훌륭한 맛을 몇 년이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요? 20년이 지나면 '절정'을 지나 밋밋하게 맛이 꺾여 있을까요, 아니면 더 우아하게 숙성돼 있을까요?
내년(2024년)은 베를린 테이스팅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1위 와인이었던 비네도 채드윅 2000년 빈티지는 지금 어떤 맛으로 변해 있을까요? 국내 와인업계에선 벌써 내년 20주년 행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식을 다 동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칠레 와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 에두아르도 채드윅 '더 베를린 테이스팅'에서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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