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강 차별하는 ‘남성 중심적 의학연구’…한국의 현실은?
국내 의‧생명 연구자, 젠더변수 적용과 분석에 어려움 호소
신약개발을 위한 동물실험에서 수컷 쥐를 사용해온 관행을 비롯해 남녀가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이뤄진 인체적용 임상시험 등으로 인해 여성의 건강이 차별받고 있다.
◆약물 부작용 여성이 2배=사라 베일리(Sarah Bailey) 영국 바스 대학교(University of Bath) 신경약리학 교수는 15일(현지시간) 다국적 NGO와 연구기관들의 참여로 운영되는 학술전문지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대화)’ 기고를 통해 많은 의약품의 권장용량 기준이 성인 남성에 맞춰졌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보다 약 2배에 가까운 약물 이상반응(ADR)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됐던 의약품들일수록 여성은 일반적인 남성보다 체중에 비해 더 많은 용량의 약물을 처방받고 있으며,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흡수(대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에 대한 기초연구도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라 베일리 교수는 “의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여성이 약물 임상시험에서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여겼다”며 “그러나 1990년대 미국에서 여성이 임상시험에 포함되도록 법률 개정이 이뤄진 이후 성별에 따른 의학적 차이가 점점 더 많이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예로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 진단을 받을 확률이 두배 더 높으며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반응에서도 성별 차이가 분명히 나타난다”며 “여성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에 대한 반응이 더 강한 반면, 남성은 삼환계 항우울제(TCA)에 더 잘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또 심뇌혈관계질환 치료에 사용되는 베타 차단제의 경우, 같은 양의 약물을 복용한 여성은 혈중 농도가 남성보다 더 높으며, 이는 체중을 고려한 후에도 명확하게 확인된다.
베일리 교수는 이러한 차이가 성별 호르몬과 혈액 내 효소의 활성도 등이 다르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의학적 비극 ‘탈리도마이드’ 사태=남성 중심적 접근 방식이 비극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태를 빼놓을 수 없다.
1953년 서독에서 개발돼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임산부들의 입덧 방지용으로 판매된 탈리도마이드는 출시 초기에는 ‘부작용 없는 기적의 약’으로 선전되며 안정적인 진정제로 여겨졌지만, 곧 기형아 출산 부작용이 확인됐다.
이후 신약개발 과정을 조사한 결과, 임신한 동물이나 인간에 대해서는 임상시험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점이 드러났다. 그 결과 전세계 약 46개 국가에서 약 9000명 이상의 신생아들이 ‘물개사지(Phocomelia)’ 즉 물개처럼 팔‧다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선천적 기형을 안고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지난 1990년대 여성의 임상시험 의무참여 법률개정 이후 생물학적 성별(유전적)과 성별(개인의 자아정체성)을 임상 연구의 설계‧분석‧보고에 통합하도록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국립보건원(NIH) 여성건강연구 자문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NIH가 자금을 지원하는 임상연구 참가자의 약 절반이 여성이다. 또 옥스퍼드 대학과 미국의사협회 등 권위있는 국제학술지를 발간하는 다양한 연구평가기관이 성별을 고려한 연구결과만을 출판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국내에선 어떨까?=국내에서는 신약개발을 위해 인체적용 임상시험을 진행할 때 여성 참가자의 특성이 대등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관련 규정이 명확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성별 특성을 반영한 의료‧과학기술연구가 부족한 실정인 것.
김혜진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GISTeR) 선임연구원은 “국내 많은 연구진들이 성별 특성을 반영한 연구인식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관련 규정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특히 과거에 시판된 의약품의 경우 ‘성인’을 기준으로 복약기준이 설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남녀 차이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의‧생명 분야에서 젠더변수 적용과 분석에 어려움을 겪는 연구자들이 많다”며 “건강에 직결된 문제인 만큼 관련제도 정비와 성차의학 인식 확대가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