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사진에 매달리는 이유…“날 구제해주는 존재”[인터뷰]
“사진, 인위적 ‘창작’ 아닌 ‘발견’의 작업”
흔한 사물이 숭고하게 보이는 순간 포착
“극장가 생존 핵심은 ‘시네마틱 체험’”
HBO ‘동조자’ 이어 넷플릭스 ‘전,란’ 제작
“오페라, 뮤지컬, 사극, 못해본 것 욕심”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영화가 창조하는 작업이라면 사진은 발견의 작업에 가까워요. 영화는 꾸며낸 이야기에 시각적인 요소를 인위적으로 디자인합니다. 그런 일만 하다 보니까 다른 방향에서 이미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칸의 남자’, ‘깐느박’, ‘한국의 알프레드 히치콕’.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는 박찬욱 감독은 파격적인 연출과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세계적인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영화 외에 천착하는 장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진이다. 박 감독은 오래 전부터 사진을 찍어왔다.
그는 최근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열린 기획전 ‘발견: 12명의 한국 현대 작가(Discovery: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에 참여했다. 뉴욕 링컨센터가 주최한 ‘썸머 포 더 시티(Summer for the City)’의 ‘코리안 아츠 위크(Korean Arts Week)’ 프로그램 중 하나이자 온라인 아트 플랫폼 아투(Artue)가 기획한 행사다. 박 감독은 최근 경기도 파주 헤이리 마을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단독으로 만나 행사에 참여한 소감을 밝혔다.
“다양한 분야의 젊은 작가들과 섞이는 일은 사실 드물어요. 영화에서 경력을 쌓아온 저로서는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죠. 뉴욕 말고 서울에서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박 감독은 평소 일상적인 소재를 렌즈에 담는다. 덩그러니 놓인 소파, 절 앞에서 잠든 강아지, 빈 버스의 좌석, 접혀있는 파라솔.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소재이지만, 그의 렌즈를 거치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멋있는 장소에 일부러 가서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하찮은 사물이 뭔가 숭고한 물체처럼 보이거나 웃기게 보일 때가 있어요. 각도나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달라 보이죠. 시간대, 계절, 날씨 등에 따라서도 정말 놀랄 만큼 달라 보여요.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어떻게 찍힐 지 완벽한 비전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정확히 구현될 지 늘 궁금하죠.”
박 감독은 2014년부터 사진 활동을 활발하게 해왔다. 각종 사진전에 참여하고 사진집을 낸 데 이어 2018년과 2021년엔 개인전도 열었다. 서울 용산 CGV 아트하우스의 박찬욱관 앞에 전시된 사진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림과 사진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주말이면 박 감독을 비롯한 삼 남매를 렌즈에 담았다. 아버지의 사진은 평범하지 않았다. 피사체는 늘 삼 남매였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구도는 매우 독특했다. 박 감독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독특한 구도를 눈 여겨 봤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카메라는 얼마 뒤 박 감독이 물려받았다. 원래 관심이 많았던 미술과 영화 분야로 대학을 가지 못한 그가 대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간 덕이다. 박 감독은 영화 작업을 본격화한 이후에도 사진을 더 찍었다.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더러운 팔자’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여행을 정말 질색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촬영이나 영화제 때문에 하기 싫은 여행을 계속 해야 하는 ‘더러운 팔자’가 된거죠. 현대 영화 감독에겐 업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저를 구제해주는 것이 사진이에요. 억지로 하는 일 속에서 흥미로운 일을 찾는 거죠. 영화제에 가면 주최 측에 자유 시간을 요청하고선 사진을 찍으러 다녀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은 사찰이다. 절 사진을 찍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정도다.
“신앙은 없지만 이상하게 절이 근원적으로 끌려요. 깊은 산 속에 옛날 사람들이 놀라운 안목으로 찾아낸 자리에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거잖아요. 수련과 기도의 공간 속에 건축과 식물에 깃들어 있는 영원성에 끌려요. 언젠가 절 사진만 모아서 전시하거나 사진집을 낼 생각도 있어요.”
박 감독은 인터뷰 도중 사찰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아이패드를 꺼냈다. 아이패드 커버엔 “Casting ‘The Sympathizer’”(‘동조자’ 캐스팅 모집)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의 차기작인 미국 HBO 드라마 ‘동조자’에 참여할 베트남 배우들을 모집한다는 홍보 스티커다.
드라마 ‘동조자’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퓰리처 수상작인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남베트남 군인이 미국과 북베트남의 이중 간첩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박 감독은 총괄 프로듀서이자 쇼 러너로서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그는 7개 에피소드 중 첫 3개를 연출한다.
“책을 읽는데 시작부터 너무 재밌었어요. 어두운 유머가 제 성격에 잘 맞았고, 아이러니하고 부조리한 것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것이 딱 제 취향이었어요. 바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동조자’는 베트남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드라마는 주로 태국에서 촬영됐다. 베트남 정부가 원작 소설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베트남에 사는 배우들도 구하기 어려워 세계 곳곳에 있는 베트남 출신 배우들을 최대한 섭외했다.
“배우들이 베트남어로 연기를 하는 장면이 절반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제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보편적인 어떤 감이 있더라고요. 제가 오케이나 컷하는 순간 베트남 컨설턴트도 똑같이 느꼈어요. 그런 게 참 신기해요.”
‘동조자’엔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산드라 오가 출연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이번 작품에서 1인 5역을 맡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즉흥 연기에 천재적이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카멜레온 같은 변화무쌍한 역할이 필요해서 미친 척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캐스팅을 제의했는데 운 좋게 됐죠. 산드라 오는 작은 배역인데도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연기를 정확하게 하고,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아는 배우에요.”
박 감독은 ‘동조자’ 작업과 동시에 넷플릭스 영화 ‘전,란’의 제작도 맡고 있다. 박 감독과 넷플릭스의 첫 협업 작품이라는 점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사실 넷플릭스과의 작업은 업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되기도 하고, 콘텐츠가 넷플릭스로 쏠린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다면서도 선택의 측면에 무게를 뒀다.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영화 ‘아이리시맨’나 ‘로마’와 같은 작품은 필요한 예산을 다 얻지 못했을 거에요. 감독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죠. 훌륭한 감독들이 예산이 충분치 못한 대신 극장에 개봉하느냐, 아니면 예산을 충분히 확보한 댓가로 극장을 포기하느냐의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건 감독 개인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박 감독은 코로나 앤데믹에도 여전히 회복세가 더딘 국내 극장가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영화관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관객들의 ‘시네마틱(cinematic) 체험’ 여부가 극장가 생존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극장가는 더디더라도 회복은 할 거라고 봐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대체될 수 없어요. 다만 극장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할지는 말하기 쉽지 않아요. 관객들을 끌 요소가 중요해요. 각각의 영화들이 시네마틱한 체험을 어떻게 제공하느냐, 어떻게 특화하느냐의 문제죠.”
이번 여름 극장가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대작 네 편을 포함해 총 여섯 편의 한국 영화가 몰렸다. 극장가에서 다행히 선방하고 있는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감독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박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박찬욱 키즈’다.
“두 감독 모두 제 후배지만 많이 달라요. 류승완 감독은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걸 잘해서 감탄하게 하는 후배에요. 반면에 엄태화 감독은 저와 결이 비슷해서 친숙하게 느껴지는 후배죠. ‘밀수’에선 김종수 배우를 보면서 ‘연기를 저렇게 잘하는 배우였구나’ 하면서 놀랐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선 이병헌 배우가 새로운 장을 열었더군요.”
그에게 칸의 영광을 처음 안겨준 영화인 ‘올드보이’는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았다. 당시 불혹이었던 박 감독은 오는 23일이면 환갑이 된다. 그 사이 그는 ‘박쥐’와 ‘헤어질 결심’으로 칸 영화제를 두 차례 또 압도했다. ‘깐느박’이란 별명까지 얻었지만 매번 성공 신화만 쓴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년)와 영국 BBC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년)이 대표적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애착이 큰 작품이에요. 영화 속 유머를 좋아하는데 이상한 영화로만 취급 받았죠. ‘리틀 드러머 걸’의 감독판은 한국에서만 배급됐어요. 외국 관객들이 감독판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요. 감독판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이 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지 30여 년. 국경과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도전을 해왔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갈망한다.
“오페라 연출 제안이 많이 오는데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못하고 있어요. 뮤지컬도 언젠가 해보고 싶어요. 서부극, SF(Science Fiction) 액션, 공포 영화도 관심 있어요. 사극도 안 해봤는데 기회가 되면 한국이나 영국 사극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직 해보지 않은 게 너무 많네요.”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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