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하지 말고 감각하라, ‘산재 공화국’의 현실을

도재기 기자 2023. 8. 1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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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기획전, 노원희의 ‘거기 계셨군요’
노동자·여성·청년… 사회 약자 보듬는 작업
산재·젠더 문제 적나라하게 다뤄
198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130여점
원로작가 노원희의 대규모 개인전이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위는 기업들의 산재 은폐를 잘 보여주는 작품 ‘사복으로 갈아입히고’(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콜라주, 162×130cm)이며 아래 좌우 사진은 작품의 세부모습이다. 아르코미술관, 도재기 선임기자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약자를 해치는 정치·사회적 부조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권력·자본·기득권 세력이 적극 은폐하는 데다 설사 가시화되더라도 그들의 막강한 권력·자본의 힘으로 본질은 왜곡되기 일쑤다. 모순과 부조리는 각자도생의 사회일수록,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강화될수록 더 교묘하게 숨겨진다.

원로작가 노원희(75)는 비가시적인 정치·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를 예술작품으로 가시화시킨다. 1980년대 군부독재 탄압 속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해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인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으로 활동한 이후 지금까지 이르렀다. 시대·사회상 변화에 따라 작품세계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 표현 방식 등으로 확장됐지만 그 바탕은 여전하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예술가로서 부조리한 현실과 은폐된 이면의 병폐를 붓질로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여성·청년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화면에 녹여낸다. 인간 소외, 무한경쟁 심화 속에 인간의 실존적 물음을 던지기도 하고, 세태 변화를 예민한 예술 감각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노원희 작가의 개인전 ‘거기 계셨군요(You were there)’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초대전으로 마련됐다. 1980년대 작품부터 최신작, 새롭게 시도한 천 작업, 아카이브 등 13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 예민한 감각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은폐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를 비로소 인식하고, 유령처럼 치부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거기 계셨군요”라며 말을 걸고 손을 건네는 귀한 자리다.

전시장에서 유독 눈길을 잡는 것은 산업재해(산재)를 다룬 작품들이다. 작품 수도 많은 데다 대부분 대작인 신작들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근래 산재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열심히 작업 중”이라며 “산재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노동 현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원희의 ‘큰 회사’(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콜라주, 80×100cm, 왼쪽)와 대작 ‘탑’ 전시 모습. 아르코미술관 제공
노원희의 ‘청년의 봄’(2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60.5×72.5cm). 아르코미술관 제공

실제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지만 후진국형 산재가 끊이질 않는다. 통계청의 ‘한국의 안전보고서 2022’를 보면, 산재로 지난 한 해 사망한 노동자만 2223명이다. 현장 사고로 874명이, 관련 질병으로 1049명이 숨졌다. 전년보다 143명이나 늘어났다. 헌법에는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아침에 멀쩡하게 출근한 노동자가 매일 2명 이상 죽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라가 지금의 한국이다. ‘산재공화국’ 오명을 쓴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의 생명보다 이윤·돈을 먼저 따지고, 많은 이들이 방조하기 때문이다.

전시장 입구의 ‘탑’은 의족·의수를 한 산재 피해자 등이 몸으로 탑을 쌓은 형상이다. 아슬아슬 불안정하다. 한국의 노동 현실을, 지속 가능하지 않은 모순적 체제를 은유하는 듯하다. 또 하청과 재하청에 이르는 다단계 하청구조 같은 개선되지 않는 고질병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사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산재가 일어나면 노동자가 입고 있던 회사 작업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혀 병원으로 보내는 기업들의 산재 은폐를 꼬집는다. “산재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119신고도 못하게 한다” 등 피해 노동자들의 발언을 작가는 천에 적어 작품에 붙였다. 그들의 존재·목소리를 알리는 것이다. 작가는 ‘큰 회사’ ‘화력발전소’ ‘37년’ 등의 작품을 통해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사망 사고’, 김용균씨가 사망한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SPC 계열사 사고’ 등 숱한 산재 사고의 이면을 전한다. 작가 특유의 붓질과 색감, 현실과 초현실 넘나들기, 화면 속 공간감 등을 통해서다.

노원희의 ‘무기를 들고’(2018,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왼쪽)와 ‘자화상 95 (자화상 2)’(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73×100cm). 아르코미술관 제공
노원희의 ‘얇은 땅 위에’(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62×130cm, 왼쪽)와 1980 작품인 ‘한길’(1980, 캔버스에 유채, 130.3×16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르코미술관 제공

작가는 극도의 생존경쟁에 놓인 청년들의 삶도 살핀다. ‘사발면이 든 배낭’ ‘라면 먹는 사람’ ‘청년의 봄’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 현실, 청년들의 심리적 풍경 등을 기록하고 공감과 연대를 담아낸다. 젠더 문제를 다룬 작품들도 이번 전시의 한 축이다. 작가는 일상과 사적 공간에 파고든 폭력과 억압·혐오의 정치를 주시한다. 그리고 여성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관습에 균열을 내고 인권문제, 가사노동 등 여성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되짚는다. ‘무기를 들고’ ‘오래된 살림살이’ 등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 세태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들도 주목된다. 특히 1999년과 2023년 그린 ‘아침운동’은 생활환경 변화상은 물론 표현법 등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홍제천에서 1’은 아빠와 딸을 통해 소통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흰 천에 다양한 인간 군상이 담긴 대형 천 작업 ‘몸 53’은 관람객 저마다의 사유를 자극한다.

최근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한 노 작가는 “제가 보고 마주치고 부딪히는 문제들을 마음에 담았다가 그린다”며 “깊은 침묵과 더불어 작품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는 전시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임근혜 아르코미술관장은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바로 이곳에서 정부의 검열로 인해 무산됐다”며 “당시 참여 작가이자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예술언어로 표현해온 노 작가의 작품전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 예술의 힘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1월19일까지.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초대전 ‘노원희-거기 계셨군요’의 전시장 전경 일부. 도재기 선임기자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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