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한 번도 힘든 득음을 두 번이나 얻은 진정한 천재…명창 오지윤 인터뷰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양형모 기자 2023. 8. 16. 1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승 강도근이 뭇 명창들 앞에서 인정한 천재 소녀
치열한 독공 끝에 두 번째 득음의 경지에 오르다
판소리와 가요창법 자유자재…“팝 음원 낼 것”
“소리 삼매경에 푹 빠져 삽니다.” 근황을 묻는 짧은 질문에, 더 짧은 답이 돌아왔다.

명창은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소리를 ‘평생’ 하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오지윤은 소리를 평생, 그것도 잘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0.5초도 쉬지 않고 ‘명창’이라 명명할 수 있다.

명창과의 인터뷰는 꽤 긴 식사와 함께 진행됐다.

명창의 말은 판소리 마냥 길고 끊임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그의 황홀한 솜씨에 홀딱 빠져 어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들었다.

텍스트로 제한된 글 기사 안에 명창의 표정, 몸짓까지 넣을 수는 없지만, 상상이라도 근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명창의 말과 어투를 살려 쓰고자 했다.

이런 시도는 현장의 생동감을 살리는 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물러지고 종종 얘기가 샛길로 빠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를 채택해 쓴 것은 명창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 안의 속살까지 독자의 눈 앞에 내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햇빛이 뜨거운 7월의 어느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의 인근 식당에서 명창은 이렇게 말했다.

“소리 삼매경에 푹 빠져 삽니다.”

●남원의 천재소녀, 명창 강도근을 만나다 - 오지윤 명창께서는 어린 시절 ‘소녀 명창’, ‘원조 국악신동’, ‘남원애기’ 등의 별명을 얻으며 세상에 알려지셨습니다. 기업가, 정치인, 언론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소리 애호가들이 어린 소녀 명창의 소리를 듣기 위해 줄을 섰다는 일화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판소리는 어떻게 해서 입문하게 되셨나요.

“저는 남원이 고향이지만 외가 친가 쪽 다 둘러보아도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만 별종인 셈이죠.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 동네 분들과 우연히 광안루로 마실을 나갔다가 판소리 강습 중인 강도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판소리라는 장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강도근 스승님과의 첫 인연이 되었던 것이죠.”

(강도근 명창은 191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96년 사망했다. 20세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판소리 명창으로 호남 5명창의 일인으로 꼽힌다)

“본격적인 국악수업은 남원여중에 입학해서였습니다. 마침 남원여중 이종호 교장 선생님과 따님이신 이영숙 음악 선생님께서 예고가 아닌 일반 인문계 여학교로서는 전국 최초로 국악반을 설립하셨고, 그 덕에 저는 자연스레 국악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 국악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 국악반에서 처음 국악을 접하게 되신 거군요.

“네. 그렇게 됐죠. 그러다가 그 이듬해 전북학생예능대회에서 가야금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교장 선생님 추천으로 본격적으로 남원국악원에 다니게 됐습니다. 판소리와 무용, 사물, 가야금산조, 병창 등의 수업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강도근 선생님과 재회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익히게 됐습니다.”

-오 명창께서는 국악계의 대표적인 ‘천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도근 선생님께서는 워낙 과묵하신 분이고 엄격하셨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순수하시고 철학있는 진정한 예술가셨지요. 무섭기만 했던 스승님의 환갑잔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선생님 댁을 방문했는데,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창님들이 마당에 덕석을 깔고 앉아 막걸리를 들고 계시더라고요.”

“어머니와 제가 쭈뼛대며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강 선생님께서 홍안을 뒤로 하시고 마루에서 버선발로 우르르 제게 달려와 덥석 안으시며, ‘야가 천재여. 백 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소리목을 타고 났어. 하나를 알려주면 열 개를 지가 해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 내로라 하는 전국의 명창들 앞에서 제자를 천재로 ‘공증’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네요.

“그날 이후 저는 오늘날까지 제가 정말 천재인 줄 알고 그 프레임에 갇혀 살았어요. 그러다나 깨달음을 얻게 되었죠. 진정한 천재는 타고난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마침내 완성된다는 진리를요.”

하지만 적어도 이날 이후 오지윤 명창이 천재의 길을 걸어온 것만은 틀림없다. 수많은 대회 수상경력과 무대가 이를 증명한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추려봐도 이 정도다. KBS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성악부문 최우수상(1982), 전주 대사습놀이 제1회 학생전국대회 판소리 차상(1983년),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 금상(1986)을 수상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이며 한양대에서 국악과 학사,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2017년 심청가 완창무대를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좀 독특한 이력이라 할 수 있겠다.

-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판소리와 오페라를 조합한 ‘판페라’라는 장르를 개척하셨습니다. 한국판페라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셨죠.

“우리 민족 특유의 한과 신명을 표방했던 국악과 판소리가 설 자리를 잃고 점점 스러져 가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어떻게 해서든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현대적 감각으로 국악과 판소리의 재해석을 시도해 본 겁니다. 동서양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화된 장르를 선보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탄생한 장르가 판페라입니다.”

오지윤 명창이 탄생시킨 ‘판페라(Pansori+Opera)’는 판소리의 눈대목을 오페라 아리아처럼 동서양의 융복합된 음악을 배경으로 부르는 장르이다.

- 많은 국악인들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악, 그중에서도 판소리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조선 말 태동한 판소리는 동헌이나 저잣거리에서 펼쳐지는 소리판이었죠. 인간의 생로병사, 희로애락 등 삶의 다양성과 이면을 그렸던 남창 위주의 마당소리였습니다. 해방 후 남창 위주의 원형소리가 사라지고 권력층이 향유하는 문화로 변질되면서 기방으로 들어오게 되니 여창 위주의 시조, 가곡이나 민요로 변형되었습니다.”

“그후 판소리는 문화권력에 의해 40여 년을 판소리와 민요가 혼용되면서 오늘날에 이릅니다. 설상가상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판소리의 가락과 리듬(장단)이 변질되면서 판소리는 사라지고 가요¤민요(박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요. 자연스레 ‘가왕’이란 타이틀도 이미자, 조용필씨 같은 대중가수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또 한 번의 득음 … 결국 하나의 플랫폼이었다

“어떠한 예술도 본질에서 벗어나면 그 기능과 역할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예술의 본질인 삶의 다양성과 이면을 표현해 내도록 오지윤의 소리로 판소리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합니다.”

- 오지윤의 판소리로 판소리의 원형을 복원한다라 … 과연 오 명창다운 원대한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동안 칩거하면서 소리공부에 매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득음’을 하셨는다는데요. 새로운 득음은 이전의 득음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어떤 공부를 하신 건가요.

“시대 트랜드에 따라 저도 ‘판소리’가 아닌 ‘가요¤민요’ 발성으로 국립극장에서 완창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나름 즐거웠다지만 저 자신이 만족이 안되었어요. 뭔가 허전하고 영혼이 흔들렸죠.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소리공부를 하면서 호흡과 발성을 새롭게 연구, 분석하다보니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 인체는 다양한 소리가 나오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구성되었음을 알게 된 거죠.”

- ‘하나의 플랫폼’이요?

“네. 판소리에 매진하면서 가요발성을 병행하다 보니 판소리는 민요, 가요 등의 발성을 아우르는 바다같은 모든 소리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로써 제 소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고, 저는 이를 ‘제2차 득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 평생 한 번도 하기 힘든 득음을 두 번이나 이루셨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빛이 나는 최고 수준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판소리를 서양음악과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오페라라고 한다면.

“우선 크게는 동서양의 문화와 정서 차이라 보는데요. 판소리는 1인 퍼포먼스이면서 주로 ‘음(陰)의 소리’를 지향함으로 하단전(下丹田) 호흡을 이용한 사실적 발성을 구현합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학, 음악, 예술적 요소를 고루 갖춘 종합예술이죠. 반면 서양의 오페라는 복식호흡을 이용한 ‘양(陽)의 소리’로 정형화된 벨칸토 발성을 주로 구사합니다. 내용적으로는 다양한 출연자들이 각각 구현하는 노래와 음악을 조화와 균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예술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판소리는 음의 소리, 양의 소리를 아우르며 넘나드는 우주의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우월성을 인정받아 인류 성악곡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생각합니다.”

- 판소리는 전형적인 ‘라이브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음반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소리꾼들의 완창무대에서 받게 됩니다.

“판소리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음의 소리로 종합예술을 구현함으로써 관객과 소통 공감을 이끌어 내어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주고 받기에 특별한 감동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소리학교 연 명창, 판소리의 세계화 위해 기여할 것 - 요즘 국악 전공자, 국악 전문 연주자들이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 등에 나와 눈길을 많이 끌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중에게 멀어진 국악의 현실이고, 잠시 지나가는 트렌드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디션 프로를 하려면 전통도 고수하면서 시대 흐름에 부응하도록 하는 게 좋겠죠. 예를 들어 1부 판소리, 2부 판페라(아리아), 3부 판포크 서바이벌을 진행하는 식의 방법이 있을 겁니다. 진정한 고수를 발굴해 한국전통예술의 위상을 드높이고, 나아가 문화와 예술로 국가의 위상과 품격을 갖춰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을 고양시키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미디어 언론매체가 선도해야 할 역할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마치 서양 오페라가 뮤지컬-팝페라 등으로 시대전환을 이루어 가고 있듯이 말이죠.”

- 최근 ‘소리학교’를 여셨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곳은 어떤 곳이며, 어떤 수강생들이 강습을 받고 있는지요.

“서울 광진구에 있는 후배가 운영하는 종합음악학원입니다. 후학양성을 위해 기다리는 전공자라기보다는 판소리 매력에 빠져 수십 년 동안 학습해 온 수강생들이고요. 다행히 오지윤의 소리 레슨에 만족도가 높다고 하니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 소리학교를 여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오래 전부터 판소리 동호인들의 요청도 있었어요. 저 스스로도 제 소리의 완성도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니, 후학양성에도 시선을 돌려야 함을 깨달아 용기를 내어 소리학교를 열게 됐습니다.”

-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차 득음을 하신 오 명창께서는 이제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그간 노력하고 준비해 온 소리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크게는 제 숙원인 판소리를 대중화, 세계화 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우선 2차 득음한 소리로 국립극장에서 심청가 완창을 대중에게 선보이고 싶습니다. 물론, 판소리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후학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나가고자 합니다. 또 하나는 판소리 창법이 아닌 가요 창법으로 가요, 팝 음원을 내는 겁니다. 꽤 재미있는 시도가 될 것 같아 저도 엄청 기대가 되는 데요. 관심 있는 음원 제작 관계자 분 계시면 연락 바랍니다(웃음).”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Copyright © 스포츠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