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왜 간첩으로 몰렸나…영화 보기 전 알아둘 지식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국내에서도 지난 15일 개봉하면서 흥행몰이에 나섰다.
이 작품은 역사적 인물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로, 상영 시간이 180분에 달하는 만큼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가지고 극장을 찾으면 영화를 더 잘 즐길 수 있다.
영화의 원작인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의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등을 참고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배경지식을 정리해봤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생애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천재 물리학자다.
그는 1904년 미국 뉴욕의 독일계 이민자 출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5년 하버드대 학부를 졸업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네덜란드 라이덴과 스위스 취리히 등에서 연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돼 물리학을 가르쳤다.
1920년대는 양자역학이 과학계의 관심사로 떠오른 때였고, 오펜하이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에선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성자별과 블랙홀 등도 그의 연구 주제였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도 끊임없이 '별의 죽음'에 관해 논한다.
오펜하이머의 관심사는 물리학을 넘어 문학, 미술, 음악, 사회, 정치로도 뻗어나갔다. 요즘 말로 하면 '통섭'의 천재였던 셈이다.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직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도 관심을 가져 공화파를 지지했고,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던 캐서린 퓨닝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영화에선 키티로 불리는 캐서린은 당시 남편이 있었지만, 헤어지고 오펜하이머와 결혼했다.
저명한 물리학자로만 남았을 수도 있는 오펜하이머의 삶은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하고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전기를 맞는다.
우라늄 핵분열 실험에 성공한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경우 인류에 재앙적 결과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자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미국과 영국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집결한 이 사업을 이끈 인물이 오펜하이머다. 그의 주도 아래 1943년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거대한 연구단지가 건설되고, 이곳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들이 최초의 핵폭발 시험에 성공한 건 1945년 7월 16일로,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였다. 미국이 개발한 원자폭탄은 그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돼 일본의 항복을 끌어냈다.
오펜하이머는 1947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1952년까지 재임했다. 이 시기 그가 수소폭탄을 포함한 핵개발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정적들이 생겨난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했다. 핵개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는 소련에 우호적인 인사로 몰리고, 연방수사국(FBI)은 의혹을 입증할 자료를 수집한다.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간첩이란 주장까지 제기돼 1954년엔 청문회가 열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 등이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내놨다. 원자력위원회는 그의 간첩 의혹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기밀 접근 권한을 박탈했다.
원자력위원회가 이 결정을 취소한 건 지난해 12월이다. 68년 만에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회복한 셈이다. 오펜하이머는 1967년 세상을 떠났다.
스트로스·그로브스·태트록…오펜하이머의 주변 인물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주변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원자력위원회 의장을 지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 것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회고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스트로스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수소폭탄의 개발을 추진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반대에 부딪혔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수소폭탄 개발을 승인하면서 스트로스의 손을 들어준다.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간첩 의혹을 받게 된 것도 스트로스와 무관치 않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 진행 단계부터 오펜하이머를 의심했고, FBI에 오펜하이머의 감시를 요청했다.
스트로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상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지만, 의회 인준 청문회를 통과하진 못했다.
또 다른 주변 인물로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도 빼놓을 수 없다. 미 육군 장교인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로스앨러모스의 연구단지 건설을 지휘한 것도 그로브스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연인으로 나오는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은 오펜하이머가 캘리포니아대 교수 시절 만난 여성이다. 태트록은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인물이었고, 그와의 관계는 나중에 오펜하이머의 발목을 잡는다.
영화엔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일부 관객은 15세 관람가 등급엔 부적절한 수준 아니냐고 문제 제기하기도 한다. 인도에선 오펜하이머가 태트록과의 정사 장면에서 힌두 경전 구절을 읊은 게 논란이 됐다.
한국 역사와도 관련있는 오펜하이머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 인물인 오펜하이머는 한국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그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당겼고, 일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한국의 광복도 그만큼 앞당겼다.
'오펜하이머'가 광복절 개봉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본에선 아직 이 영화의 개봉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한반도에 핵전쟁의 공포가 여전하고, 한국에서 핵보유론이 대두하는 상황도 '오펜하이머'가 한국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 버드와 셔윈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며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썼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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