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핏빛 복수극’으로 재탄생한 그리스 비극
“미안하다, 우리 딸. 신들의 명이다.” 아이 눈에 어리는 공포. 외마디 비명 속에 아버지는 칼로 딸을 찌른다. 이 장면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선율이 흐르는데, 이 집안에 씌워질 참혹한 운명의 굴레를 암시하는 듯하다. 딸을 제물로 바쳐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배우 문성복). 하지만 꼬리를 무는 복수의 악순환 속에 그의 집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장장 5시간, 국립극단 역대 단일 작품 최장 러닝타임이다. 연극 ‘이 불안한 집’은 권력과 운명, 복수와 트라우마 등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 방대한 작품.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새롭게 해석했다.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스튜디오에서 3부 가운데 1부를 시연했는데 꼬박 2시간이 흘렀다. 2016년 영국에서 초연돼 호평받았다.
“2500년 가까이 살아남은 연극이에요. 강력한 드라마가 있고, 인간 본연의 본성을 흔드는 힘이 있죠.” 2017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받은 김정 연출가는 “3부작 형식의 그리스 비극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작품”이라며 “(각색)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헛웃음이 날 정도로 잘 써진 작품이라 전율했다”고 떠올렸다. 아이스킬로스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꼽힌다. 직접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해 싸웠다.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대회’에서 모두 13번 우승했는데, 그에게 마지막 우승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다.
“엘렉트라, 잘 봐. 네 아빠야. 이 남자는 어린아이를 죽인 살인자야.”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배우 여승희)는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한다”며 남편을 향해 칼을 겨눈다. “이 집안은 저주받았어. 지독한 악행을 보게 될 거야.” 아가멤논을 따라온 카산드라(배우 공지수)는 광기에 휩싸인 채 바닥 위를 구르며 이렇게 외친다.
1부는 코러스극, 2부는 실내극, 3부는 시적인 느낌의 현대극이 될 것이라고 김정 연출은 설명한다. 1부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딸 이피지니아를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과 그런 남편에게 복수하는 아내의 이야기다. 2부는 아가멤논의 또 다른 딸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살해하며 반복되는 복수를 다룬다.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현대적 감각을 새로 입힌 3부의 배경은 현대의 정신과 병원으로 옮겨간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현대의 시공간에 들어온 엘렉트라는 비슷한 트라우마를 지닌 정신과 의사 오드리에게 상담을 받는 환자다. 의심과 배신, 광기와 불안, 증오와 죄책감이 얽히고설킨 이 고전 비극은 이야기의 자극적 전개가 현대의 ‘패륜 막장 드라마’를 뺨친다. 하지만 그 속엔 정의와 권력, 행위의 정당성, 현대인의 죄책감과 트라우마 등 가볍지 않은 물음들이 담겨 있다.
“1부는 왕을 살해하고 체제를 무너뜨리는 사건이죠. 2부는 부모 살인으로 가족을 벗어나요. 3부는 내가 당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거죠. 1, 2부에서 복선을 깔고 3부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거예요. 3부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게 느껴질 수 있는데 1, 2부가 3부를 위해 존재했음을 잘 짜인 퍼즐처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김정 연출은 “3부에서 드러나는 희망 없는 세상에 대한 메시지가 동시대 관객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축약되고 짧아지는 ‘쇼트폼 전성시대’에 5시간에 이르는 수천 년 전 그리스 비극은 배우와 제작진은 물론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일 터. “저도 진이 빠지는데 관객들은 오죽할까요. 제가 대본을 읽었을 때 빠져든 것처럼 관객에게도 선물 같은 작품이 되도록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보겠습니다.” 김정 연출은 “원작의 틀을 지키면서도 동시대의 의미도 놓지 않고 있는 작품”이라며 “2023년 한복판에서 이 작품이 공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무대에서 전하고 싶다”고 했다.
20대~60대 배우 15명이 21개 배역을 소화한다. 교향곡과 전자음악, 힙합 등 다채로운 음악에 맞춘 배우들의 춤과 율동이 연극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오는 31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해 9월 24일까지 이어진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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