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카르텔' 지적에 눈감고 입닫은 과학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꿈에 한껏 들떠 있던 과학기술이 갑자기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30조 원의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약탈적’ 이권 카르텔로 전락해버렸다.
지난 6월 28일에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우리 과학기술의 현실을 그렇게 규정해버렸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다짐한 8‧15 경축사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R&D 체계 개편’을 ‘교육 현장의 규칙 바로 세우기’와 함께 국정의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로 지목했다. 미래 성장 동력인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과감한 재정 투입은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 눈 감고 입 닫아버린 과학기술계
당장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을 지휘할 실세 차관이 내려왔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대한 감사원의 고강도 감사가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연구개발 예산의 총괄‧조정 역할을 담당하는 혁신본부는 존재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다고 과기정통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과학기술의 ‘비효율’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지난 정부에서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10조 원이나 크게 늘어나는 과정에서 단기간에 예산이 연평균 30% 이상 폭증한 사업도 있었고, 뿌려주기식 사업도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전례 없는 특명에 대한 과기정통부의 대응이 어정쩡하다. 엄중한 시기를 넘어서기 위한 ‘혁명적 결단’과 ‘용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 조성경 차관의 취임 일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도 찾아볼 수 없다.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제로베이스 제검토는 관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예산 삭감의 원칙이 도무지 분명치 않다. 과기정통부가 느닷없이 강조하고 있는 ‘국제협력’의 실체도 오리무중이다. 해외에서 세계 최고를 이뤄내는 현장을 ‘체화’해야 한다는 국제협력에 대한 새로운 유권해석은 과학기술계가 추구하는 ‘창조형’ 패러다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약탈적 이권 카르텔로 전락해버린 과학기술계에서도 절박감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과학기술계가 대통령의 지적에 대해 철저하게 눈을 감고, 입을 닫아버렸다. 수긍하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대통령이 지적하고, 과기정통부 장관이 인정한 ‘약탈 행위’는 그 규모에 상관없이 매우 심각한 것이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니다. 내년도 예산의 20%를 삭감해서 국제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의 땜질식 처방으로 끝내버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소중한 국민의 세금을 멋대로 나눠 먹고 갈라 먹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과기정통부 장관이 인정한 약탈 행위의 구체적인 실체를 밝혀내야 한다. 누가 어떤 예산을 어떻게 나눠 먹었고 갈라 먹었는지를 낱낱이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 과정에서 범죄 행위가 있었다면 처벌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국민에게 뼈를 깎는 사과와 반성의 메시지를 내놓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물론 그런 약탈 행위가 다시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분명한 다짐과 확실한 대책도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미래의 성장 동력이라는 화려한 수사(修辭)에만 매달리는 비겁한 자세는 확실하게 버려야 한다. 정부의 관심과 국민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연구개발 사업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수행하겠다는 책임과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과학기술계의 실천적 행동이 필요한 때다. 속절없이 실종돼버린 과학기술계의 리더십이 절실한 상황이다.
●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감동하는 과학기술
국가 지도자의 관심이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직접 경험했던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기도 하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우리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하게 된 것도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져 왔던 ‘과학기술입국’에 대한 국가 지도자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었다.
1주일에 1달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55개 창립 회원국이 되고 이제는 세계 최고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인정받은 원자력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역시 지도자의 유별난 관심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다행이다. 대통령이 직접 과학기술을 챙기고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정부 고위직에 중용해서 국정 전반에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신념이다.
고작 1년 6개월 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을 찾은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의 확실한 약속이다. 낙하산 인사로 과학기술을 함부로 흔들지 못하도록 만들고 국책 연구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게 돼버렸다. 지난 20여 년 동안 파행을 거듭한 과학기술 거버넌스가 문제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남겨진 황우석 사태는 듣도 보도 못했던 ‘황금박쥐’가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과기부가 폐지된 후 교육과학기술부·미래창조과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변신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신뢰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반복되었던 패거리‧회전문‧깜짝‧쿼터 인사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지난 정부에서 느닷없이 되살려놓은 혁신본부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과기정통부의 권한을 떼어 내고 싶어 하는 부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가 지도자의 관심에만 매달리는 권위주의 국가가 아니다. 부처의 견고한 칸막이에 갇힌 관료주의에 막혀버린 정부에서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세우는 일은 대통령의 의지로도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심지어 대통령실의 과학기술수석도 만들지 못했다. 과학기술 전문가 중심의 ‘대통령실 민관합동위원회’도 실종되고 말았다. 오히려 과학기술에 대한 관료주의적 반발은 더욱 심각해졌다. 과학기술이 약탈적 이권 카르텔로 전락해버린 것은 절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대통령의 개인적인 관심만 믿고 있던 우리 과학기술의 냉혹한 현실이 곪아 터진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뜻이다.
반도체와 바이오에 대한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도 그 열기가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대통령이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패권 다툼을 촉발한 반도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무회의에서 과기정통부 장관에게 반도체 특강을 요청했던 일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대통령의 관심을 고작 ‘인력 양성’으로 끌어내려서 수도권 대학의 입학정원 조정에 반영해버린 과학기술계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반도체와 바이오에서 시작된 대통령의 관심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책임은 온전하게 과학기술계에 있다는 뜻이다.
이제 과학기술계가 달라져야 한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과학기술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이어가도록 만들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술 패권 경쟁과 초저성장의 위기에 빠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것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혁신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다양화‧다원화를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민주화된 과학기술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하는 가장 실질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
이제는 나로호, 온누리호와 같은 과학기술이 국민을 감동하도록 만드는 수단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부 예산을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약탈적 이권 카르텔의 부끄러운 오명(汚名)을 씻어내기 위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각오를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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