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여신’도 재판할 때 눈을 가린다[박민의 시론]

2023. 8. 16. 11: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민 논설위원
‘법관의 양심’ 자의적 해석에
정치성향 따라 판결 극단 오가
일상화 굳어진 사법부 정치화
정진석 실형 선고 필연적 결과
수뇌부 교체로 치유 힘든 중증
사법 구성원 치열한 성찰 필요

원론적으로 재판은 정치적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103조에서도 ‘정치’를 읽어낼 수 있다. 헌법과 법률이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고 그에 따른 재판은 소극적 정치 과정이다. 20세기 법학 논문에서 최다 인용된 미국 법학자 리처드 포스너는 ‘대법관이 사법 자제의 입장을 취해도 여전히 정치인이다’고 말했다. ‘법관의 양심’이란 영역에서 ‘정치’는 확장된다. 재판 과정에 개인의 지식과 경험, 기질과 선입견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의 정치화’는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다. 3권분립은 선출된 (의회) 권력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비선출 (사법) 권력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인간과 여론이 항상 합리적일 수 없다. 다수의 폭력이 초래하는 위험은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법적 이성을 통해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소수를 보호하는 법치주의는, 다수결에 따르는 민주주의와 긴장 관계다. 정치인들이 ‘민주적 통제’를 내세워 사법부에 정치적 잣대를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 파괴의 출발이다.

권위주의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우리 사회는 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한다. 같은 맥락에서 ‘법관의 양심’에 대한 엄격한 해석을 지지해왔다. “법관의 양심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직업적이고 객관적인 것이어야 한다. 법리에 따라 올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판 거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 임명식 때마다 했던 연설이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는 이 같은 해석을 판결에 대한 불법적·위헌적 통제로 규정했다. 이어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같은 특정 성향의 법관들이 법원의 요직을 장악했고 이들이 주축인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부 운영을 좌지우지했다. 그 결과, 피고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재판 결과와 재판 기간이 극단을 오갔다. 사법 정의의 핵심인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이 실종된 것이다. 법조 관계자들은 재판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이 무너졌다고 한탄한다. 소송에 임하는 국민은 법관의 정치 성향 분석에 매달린다. 사법의 정치화가 일상화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한 지난 10일 판결은 이런 흐름의 필연적 결과다. 박병곤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대학 진학 직후 블로그를 통해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인 법조계의 적화를 꾀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법과대학에 침투하여 예비 법조인들의 좌경화를 선동하고 있다”고 밝힐 정도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법관에 임용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3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이틀 정도 울분을 터트리고 절망도 하고 슬퍼도 했다가 사흘째부터는 일어나야 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앞서 2019년 10월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가 불거지자 ‘누가 먼저 돌로 치랴’ ‘권력 측 발표 그대로 사실화’ 등의 내용으로 언론을 비판했다.

‘법관은 SNS상에서 사회·정치적 쟁점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에도 균형적 사고를 바탕으로 품위를 유지해야 하고, 공정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를 야기할 수 있는 외관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권고 의견 7호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박 판사가 재판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법관의 ‘양심’보다 앞세웠을 가능성이다. 예비 법조인의 좌경화를 선동했던 그로서는 ‘존엄’인 노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통상적 법 해석이나 판례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사법부 정치화는 중증이다. 수뇌부 교체로 완치될 수 없다. ‘재판이 곧 정치’라고 법원 통신망에 올리거나 자신이 재판을 맡은 조국 사건을 ‘검찰 개혁에 대한 반격’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판사들이 법원 요직에 대거 포진해 있다. 사법부의 치열한 자기 성찰과 대대적 혁신이 절실하다. 법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어도 재판할 때, 주관성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눈을 가린다.

박민 논설위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