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아버지의 역할’ 고민했을 동생···남긴 뜻 이어가고 싶다” [노동사(死), 그 후의 이야기]
분신 2일전 마지막 통화서 “마음 좀 편해졌습니다”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싶어 속이 쓰려
내게 남은 일은 동생을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제3지대장의 형 양회선씨에게 지난 100일은 숨 가쁜 시간이었다.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지난 6월21일 동생의 노동시민사회장이 엄수되고 나서야 동생이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혼자 있을 때마다 “형으로서 해준 게 없는 것 같다”는 회한이 몰려왔다. 종교에 의지하기도, 동생의 명예회복은 긴 싸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이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
양 지대장이 분신사망한 지 100일째인 지난 9일 회선씨를 경기 동두천의 한 성당에서 만났다. 회선씨는 “동생이 떠난지 3개월이 넘었지만 지금도 동생과 같이 지내던 때를 생각하면 슬픔이 멈추지를 않는다. 차분해져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감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양 지대장은 강원 속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양 지대장의 어머니는 일거리를 찾아 시장과 이웃집을 전전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일당 대신 받아온 쌀로 밥은 해먹는 경우가 잦았다. 10살 터울인 회선씨와 양 지대장은 고생하던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의 역할‘을 고민했다고 한다.
농고를 졸업한 양 지대장은 컴퓨터수리점 등에서 일했다. 2002년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7년 만에 어렵사리 두 쌍둥이 자녀를 얻었다. 양 지대장은 평소 자식들을 ‘내 분신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회선씨는 “동생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아팠는데 그러다 보니 더 애틋했다”며 “자신이 아버지의 보살핌을 못받고 자랐으니 아이들에게는 그런 환경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2012년 가정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 철원에서 약 5년간 이어오던 LPG 공급사업이 부도 위기에 몰렸다. 처음으로 빚이 생겼고, 평소 앓던 당뇨병도 증세가 심해졌다. 힘들어하는 양 지대장을 지켜보던 회선씨는 양 지대장 가족을 불러 경기 동두천 자신의 집에서 약 2년6개월을 함께 지냈다. 양 지대장은 회선씨가 운영하던 설비업체에서 일했다.
회선씨는 동생과 계속 같이 지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양 지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사회에 나가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했다고 한다. 회선씨는 “동생에게 앞으로도 같이 지내자고 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며 “나에게 신세지는 것이 미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양 지대장은 “내 힘으로 잘살아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속초로 떠났다.
양 지대장은 2015년 속초에서 철근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터라 현장에서 반장을 맡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업주 역할을 하면서 도급계약을 따내는 등 수완도 있었다.
그러나 건설 현장의 구조적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2018년 강원 평창에서 일하면서 불법 재하도급 문제를 겪었다. 원청은 양 지대장에게 공사대금을 지급했다고 했으나 그 돈을 받은 사람은 연락을 끊었다. 자신의 월급은 물론 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의 월급도 못줄 처지에 놓였다. 회선씨는 “당시 동생이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나를 고발하라. 그러면 당신들은 밀린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며 “그때 만연한 불법재하도급 구조에 질려버린 것 같았다”고 했다.
2019년 양 지대장은 민주노총 건설노조에 가입했다. 중간착취를 일삼는 일명 ‘오야지’에게 치이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감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회선씨는 “노조 가입 후에는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명절 때 보게 되면 나는 동생에게 ‘돈은 조금 덜 벌더라도 마음 편한 게 최고’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노조 활동은 양 지대장의 성격과 잘 맞았다. 코로나19 유행 당시 거리 두기로 건설 현장에서 식사하기가 어려워지자 이를 언론에 알려 상황을 개선하기도 했다. 회선씨는 “동생이 평소 조용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사회적 부조리는 그냥 두고보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며 “잘못된 것을 덮어놓고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을 못견뎌 했다”고 했다. 양 지대장은 2022년 1월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을 맡게 됐다. 이후 약 1년간 소속 노조원이 100명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하자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현장 교섭에 나서도 문전박대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양 지대장은 가족들에게 ‘괜찮다’는 말 외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선씨와 양 지대장의 마지막 통화는 분신 2일 전인 지난 4월 29일이었다. 양 지대장에 대한 경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양 지대장은 회선씨에게 “형님, 이제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라고 했다. 회선씨는 그 말을 ‘이제는 괜찮아졌다’는 걸로 이해했다. 그때까지 경찰이 8000만원을 갈취한 혐의로 동생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을 몰랐다고 한다. 회선씨는 “내가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싶어 속이 쓰리다. 왜 조금 더 관심 있게 동생의 상황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만 남는다”고 했다.
양 지대장의 분신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조선일보는 양 지대장 분신 당시 같이 있던 노조 간부의 분신 방조 의혹을 제기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기사를 공유하며 장단을 맞췄다.
회선씨는 정부와 언론의 태도에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애초에 노동자의 죽음에 사과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남겨진 자녀들이 조선일보의 분신 방조 기사를 알게 될까봐 정말 걱정됐다”고 했다. 경찰의 ‘분신방조 보도’ 사건 수사를 두고는 “고소 이후 80일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경찰이 제대로 밝혀낸 것이 없다.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며 “경찰은 시간이 흐르면 사건이 덮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속으로 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회선씨는 잠시 설비업체 일을 내려놨다. 노동사(史)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들이 “용돈은 저희가 드릴 테니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시라”고 말한 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회선씨는 “어떤 사람들은 유가족이 빨리 무너지기를, 그래서 동생의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바라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며 “내게 남은 일은 동생을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의 주장에 동조해 ‘건설노동자가 돈을 뺏고 협박을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며 “앞으로 시민단체 등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동생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들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노동사(死), 그 후의 이야기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41669?type=journalists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42286?type=journalists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42496?type=journalists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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