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향실의 조르바들

2023. 8. 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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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향실(echo chamber) :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소리를 메아리처럼 울리게 만든 방. 어떤 소리를 내도 똑같은 소리가 되돌아온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진 용어.반향실 효과 :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사고방식이 돌고 돌면서 서로를 도와주어 신념과 믿음이 증폭되고 강화된다는 현상. 결국 반향실 효과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며 진실과 유리된다. 일종의 확증편향이다.

‘불도저 브로맨스’ 시즌 2가 개봉 박두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역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를 찾은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고 치켜세운 2008년 4월의 장면 후속작이 다시 상영되려 한다. 장애물을 개의치 않는 추진력, MB의 그런 기개를 좋아한다던 부시의 고백은 한국과 미국 모두 보수정권의 지형 속에서 뽐낸 동맹 결속력 강화의 상징이었다.

15년이 흐른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미국 대통령의 ‘찐친(진짜 친구)’만 초대받는다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친교(親交) 한다. 한국은 보수, 미국은 진보 정권이어서 국정 운영의 내용·지향점이 같기 어려운데 미국 최고 권력자의 별장에서 환대를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계기로 만찬장에서 팝송 ‘아메리칸 파이’를 부른 개인기의 영향이든, 현 정권 도처에 포진한 여러 MB맨이 설계한 덕분이든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에겐 그 별장을 밟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현 정권은 홍보 소재로 삼을 만하다.

‘북한 핵·중국 견제’를 공동의 이익으로 보고 일본 총리까지 합류하는 이번 만남을 시작으로 ‘한·미·일 정상회담’이 정례화할 것이라는 관측에도 무게가 실린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두고 이리저리 재고 있는 와중에 한국에 어떤 청구서를 내밀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지 안갯속이지만 현 정권의 스탠스는 선명하다. 세계적으로 권위주의가 득세해 민주주의 체제의 세(勢)가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국면에서 오직 자유의 기치로 한·미·일이 뭉쳐야 옳다는 쪽이다.

“집게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집게손가락이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버렸어요.”(그리스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의 말)

윤 대통령은 ‘자유의 화신’ 격인 조르바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에 비견할 정도로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외쳐 왔다.

글로벌 중추 국가로 한국을 한 단계 올려놓겠다는 포부도 자유를 주창한 덕분에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안에선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46년 내놓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1964년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미국 20세기폭스 제작·인터내셔널 클래식스 배급)한 장면 중 하나다. 조르바 역할을 맡은 앤서니 퀸과 상대역 버질(소설 속 화자로는 ‘나’)을 연기한 앨런 베이츠가 영화 막판 해변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터너 클래식 무비 홈페이지]

그러나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밝힌 윤 대통령이 어떤 노선을 택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보수자유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면 기업의 경제활동에 자유의 공간을 충분히 줘야 하는데 정부의 개입이 은근하다.

고(高)물가는 지지율을 깎아 먹는 요인이어서 어느 나라 정부라도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경제부총리가 지난 6월 소비자단체의 활동까지 요청하며 라면 가격 인하를 압박해 기업이 결국 백기를 들게 한 지점은 시장 개입의 일상화와 다르지 않다.

정치 등 비(非)경제 부문에선 윤 대통령의 자유는 ‘자기편의적 자유’라고 의심할 여지가 적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왜’라고 물으면 정권은 입을 닫거나 빈약한 논리를 댔다.

‘무(無)설득 사회행(行) 급행열차’가 달리고 있다. 의혹에 대처하는 정권의 자세가 그렇다. 대통령 처가가 소유한 땅 인근으로 서울~양평 고속도로의 종점이 뚜렷한 이유 없이 바뀐 이유·경과에 대한 추궁, 대통령 관저 선정에 풍수지리전문가가 개입했다는 정황 등을 맞닥뜨리자 정권 주변 인물들은 우왕좌왕이다. 똑 부러지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정쟁(政爭)의 틀을 만들어 우회 돌파하려고 한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은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을 이해시킬 의무가 있음에도 의혹 제기가 본령(本領)에 가까운 야당과 입씨름을 통한 선명성 경쟁에만 몰두하는 꼴이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피로감이 쌓인다.

어림잡아 ‘35대 65’가 이런 양태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찬반(贊反)이 35대 65로 고착화했다.

악재가 쏟아져 지지율 30% 벽이 깨질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와도 그 밑으로 가지 않는다. 정권 입장에선 40% 이상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현상 유지만 해도 된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정치 성향·이념 구도에만 기대는 쉬운 길을 택하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것이다.

무엇보다 인공지능(AI)이 폭주하는 시대에 무속·풍수지리 논란으로 갈 길 바쁜 대한민국호(號)의 닻이 갯벌에 처박힌 양상이어서 갑갑하다. ‘매그니피센트 세븐(The Magnificent Seven)’이라고 불리는 미국 AI 선도 기업 7곳은 지난달 자발적으로 ‘AI를 안전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도한 측면이 있다. 윤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지지 의사를 표했다.

가공할 만한 AI를 장착한 ‘매그니피센트 세븐’은 두 얼굴의 야누스다. 알고리즘 등을 통해 우리의 사고 체계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들은 AI로 생산성을 높이고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등 선한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AI로 한층 막강해진 테크 지배층은 나머지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할 필요성을 한층 덜 느낀다고 대런 아세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MIT)대학 교수는 진단했다.

겉으론 선한 얼굴을 한 AI는 정치·경제 권력을 쥔 이들에게만 이익을 안겨줄 공산이 크다. 이제까지와 다른 창조적 형태로 노동자동화·노동력 대체를 밀어붙일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지적에서다.

그들의 자발을 과신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한국도 거대 테크기업에 종속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호응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자체 방어막 구축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터무니없는 비(非)과학적 논란으로 뒷걸음질 중이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100여년 전, 소설 ‘R.U.R’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쓰면서 인간을 지배하려는 로봇의 욕망을 풀어낸 것을 경계로 삼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자유의 갑옷을 입은 한국의 조르바들은 반향실(反響室)에 갇혔다.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의 생각과 유사한 의견만 듣고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보수·진보 모두 매한가지로 반대 의견을 ‘반사’한다.

간극을 메울 책무는 권력을 가진 집단에 있는데 그들에게 통합은 우선순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저 ‘일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지지층을 잡아두려는 모습이 절절하다. 분야를 막론하고 사건·사고가 터졌을 때 책임자를 색출해 벌하려는 움직임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검찰이 밤낮없이 돌발하는 사건에 대한 수사를 배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불행한 사회다. 사태를 초래한 범인을 찾아내려는 건 불행할 때 즐겨 하는 ‘위로의 방식’이라고 카렐 차페크는 일갈했다.

목차(目次) 없는 국정 운영으로는 반향실의 조르바들은 더 염세적(厭世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가 나아갈 큰 그림을 그리고, 반대 의견이 있으면 조율하라고 국가의 조타수 역할이 정권에 주어진 것이라는 자각이 절실한 시점이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자부심은 개인 차원에서만 매력적일 뿐이다.

국회 권력을 야당이 잡고 있기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불평은 백날 해봐야 누워서 침 뱉기다. 역대 정권 누구도 못했거나 하지 않은 개혁과제 하나만이라도 책임지고 처리할 수 있는 청사진을 내놓으려 한다면 내년 4월 총선 이후 운신의 공간이 넓어질 수 있다. 국회 다수당인 제1야당이 혁신의 덫에 갇혀 사분오열할 조짐이어서 통합 행보를 보이면 중도층에서 점수를 딸 것이다. 다만 오늘만 사는 듯한 조르바식 두뇌활동을 재정비할 시간이 많이 남진 않았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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