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 전혜진이 풀어가는 모녀 관계학 문제지
아이즈 ize 이현주(칼럼니스트)
내가 기억하는 그는 꼿꼿했다.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나 당당해 보였다. 무엇보다 같은 여자가 봐도 멋있었다. 배우 전혜진. 그렇다고 출연작을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 그로 인해 월요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른바 '인생 캐릭터'를 만나 차진 연기를 펼치고 있지 않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 기존의 당당한 이미지에 사랑스러움까지 장착하다니, 너무 반칙 아닌가.
지니 TV 오리지널 시리즈 '남남'(극본 민선애, 연출 이민우)에서 전혜진은 고등학교 때 딸을 낳은 김은미로 등장한다. 어린 몸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 그러나 김은미는 티 내지 않았다. 단짝 친구 미정이 든든한 지원군이자 이모(엄마보다 나은)가 되어 아빠 없이도 딸 진희를 누구보다 잘 키워냈다.
은미는 딸 진희가 어릴 적부터 연애를 쉰 적이 없다. 일단 예쁘고, 발랄하고, 애교가 많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에 더해 타고난 연애 고수로서의 능력을 발휘했을 것. 전략과 지략 없는 연애 고수가 어디 있겠는가. 언뜻 연애만 밝히는 철 덜 든 어른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은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 진심이며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무엇보다 가슴이 따뜻하다. 자칫 비현실적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이 복합적인 캐릭터를 자연스럽고, 매력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전혜진이라는 배우의 저력 덕분인 듯싶다.
엄마보다는 언니, 때때로 철부지 동생 같기도 한 은미와 진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단짝이다. 하늘이 짝지어주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모녀라는 관계는 난이도 최상급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모녀'라는 관계에는 수만 가지 감정과 갈등, 이해와 화해, 유대, 애정이 얽힌 대서사가 존재한다. 부녀, 모자와는 또 다른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결이 켜켜이 쌓여 있달까. 세상의 모든 모녀에겐 각자 그들만의 사연이 있어 결코 유형화할 수 없다. 선택할 수도,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불가항력의 관계는 평생 풀어 가야 할 문제지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기에 그만큼 더 어려운.
은미와 진희도 그 문제지를 받고 때로는 싸우고 또 때로는 웃으며 답을 써가고 있다. 다만 이들의 관계에서 사건 제공자는 대부분 엄마라는 것. '남남'이 재미있는 것은 이 점이다. 전형적인 모녀 관계의 전복.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의 모습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제목부터 '남남'이라니. 그러나 그 제목 속에 살짝 해답을 찾기 위한 힌트를 숨겨 놓은 것도 같다.
나는 딸이 둘 있다. 모녀라고 뭉뚱그릴 수 있지만 딸 1호와 2호와 나의 관계는 각각 일대일로 전혀 다른 모녀 관계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각자 성격이 판이한 인격체. 성격이 다르고,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남'이라고 하기까지는 매정하지만, 객관적으로는 타인이다. 물론 타인이 아니었던 적이 있다. 세상에 나오기 전, 모든 자식은 탯줄이라는 천륜의 끈으로 이어진 엄마의 일부였다. 모녀, 모자가 부녀, 부자와 다른 것은 이 점이다.
엄마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한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무의미한 일말의 환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속에서 나왔으니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주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자식을 완벽히 타인, 까칠하게는 '남'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다른 인격체로 인정할 때 관계에서 오는 모든 문제는 비로소 해답에 가까워질 것이다. 물론 세상의 엄마들은 이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뿐.
'남남'의 모녀도 결국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제출하면 끝나는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고 그걸 풀어야 하는 것이 함정이지만. 우리 인생은 이미 함정의 도가니므로,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데 설명서가 필요 없다는 엄마와 그래도 필요하다는 딸은 앞으로 어떻게 서로의 교집합을 이해하며 살아갈까.
'남남'은 또한 새로운 부녀 관계도 그려주었으면 한다. 박진홍(안재욱)은 드라마에서 '생부'가 등장할 때 따라오는 클리셰를 거부하고, '엄마의 남자친구'로 남았으면. "우리가 남이가?"가 아닌 "우리는 남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모녀, 부녀 관계. 나아가 가족 관계라면 보다 발전적인 가족사를 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9회 마지막 예고편에 잠깐 등장한 진희의 조부모가 쎄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부디 진격의 전혜진이 그 모든 역경을 속 시원하게 돌파하고 새로운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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