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화유산에 빠진 미국 회사…"고정관념 타파, 우리 DNA"[조재현의 조명]
"유저 자부심, 문화유산 보호 활동 원동력"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2017년 6월7일. 프랑스 경매 사이트에 조선 후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 한점이 올라왔다. 제목은 '여섯 페이지의 필사본'으로 '1759년 결혼 관련 문서'라는 간략한 설명만 달렸는데 외관이 범상치 않았다.
가지런히 엮은 대나무 위에 금니(金泥)로 새긴 글씨, 황금색 변철을 위아래로 덧댄 모습까지. 분명 '죽책'(竹冊)이었다. 조선 왕실은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책'(冊)을 만들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종묘에 봉안됐던 귀한 물건인데, 시장에 나온 것이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즉시 추가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 1819년 효명세자빈(1808~1890) 책봉 당시 수여된 죽책으로 판명됐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했거나 불에 태웠을 것으로 추정되던 바로 그 죽책이었다. 효명세자빈은 헌종(재위 1834~1849)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세간에는 고종(재위 1863~1907)을 수렴청정한 '조대비'(趙大妃)란 호칭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진위가 확인되자 '무조건 매입'으로 뜻이 모였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단기간에 수억원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재단과 문화재청은 경매 중지를 요청한 뒤 한 게임 회사에 급히 연락을 취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의 개발사 '라이엇게임즈'였다. 라이엇게임즈는 미리 마련해 둔 환수 기금 투입을 결정했다. 그렇게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150여년 만인 2018년 1월 고국 땅을 밟았고, 지난 6월 보물로 지정됐다.
민간 기업의 후원으로 돌아온 문화유산이 보물로 다시 태어난 첫 사례였다. 롤을 즐기는 젊은 게이머들은 '게임이 아니라 애국을 했다'며 환호했다.
◇ 美 게임 회사가 소개하는 한국史…"고정관념에 도전"
라이엇게임즈는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유산 환수를 적극 돕고 있다. 벌써 10년째다. 그런데 이 회사 실은 외국 회사다. 본사는 미국에 있고 2015년 중국 기업 텐센트에 인수됐다. 그런데 왜 우리 문화재 환수에 발 벗고 나서는 걸까.
"게임은 가장 현대적인 놀이 문화라고 생각해요. 라이엇게임즈는 놀이 문화를 선도하는 회사죠. 그렇기에 가장 전통적인 것(역사·문화)을 알리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의 뿌리는 문화유산에서 찾을 수 있으니까요."
최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파르나스타워 사무실에서 만난 구기향 라이엇게임즈코리아 사회환원총괄은 자사의 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회사의 '문화재지킴이' 사업을 기획한 주인공이다.
라이엇게임즈는 2011년 한국법인을 만들면서 특색 있는 사회환원 방안을 고민했다. 시설 봉사, 김장, 연탄 배달 같은 단발성 행사가 아닌 라이엇게임즈라 해야만 하고 또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특명'을 떠안은 건 2012년 2월 합류한 구 총괄이었다.
'왜 문화재에 관심을 두는 기업은 없을까'. 스치듯 남편이 던진 말이 실마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아이디어를 엮는 마중물이 됐다. "구미호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롤) 내 캐릭터가 입은 한복의 '오묘한 매력'이 부각되던 때 인데, 공교롭게도 한 학생이 '3.1절'을 '삼점일절'로 읽은 이슈와 맞물렸어요. 회사의 주 고객인 어린 유저에게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을 제대로 알린다면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겠단 생각이 들었죠."
본인에겐 암기 과목에 불과했던 역사를 재밌게 그리고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도 깔렸다. "항상 연도와 사람 이름만 외우니 머릿속에 남는 게 있을 리 없죠. 그래도 게임 회사가 풀어내는 역사라면 궁금해서라도 더 들여다보겠다 싶었어요."
무엇보다 '고정관념에 도전한다'는 라이엇게임즈 창업 정신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게임과 문화유산을 연결 지을 방안을 검토하다 문화재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 "우리는 돈주머니"…가치 있다면 전방위 지원사격
라이엇게임즈는 2012년 6월 5억원의 후원 약정을 맺고 유물 보존 처리, 청소년 대상 문화유산 교육사업 지원에 나섰다. 이후 지난해까지 10년간 76억원을 후원했다. 라이엇게임즈의 후원 아래 △석가삼존도(2014)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2018) △ 중화궁인 △백자이동궁명사각호 △척암선생문집 책판(이상 2019) △조선 왕실 보록(2022) 등 6점의 국외 소재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문화재 환수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유물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을뿐더러 매입 절차를 밟더라도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투자에 따른 확실한 성과를 담보할 수 없으니, 민간 기업에서는 쉽게 나서기 어렵다.
라이엇게임즈는 다르다. 문화유산 보호에 진심이다. 구 총괄은 매년 기부금을 모아뒀다가 환수할 문화재가 나타나면 즉각 집행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필요한 예산을 미리 책정해 쌓아 놓는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문화재 매입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이다. 수천만원이 들어가는 실견(實見) 및 환수 협상을 위한 전문가 파견에도 기꺼이 돈을 댄다.
후원은 진행형이다. 5억원이었던 연간 기부액은 8억원에 이른다. 전체 후원금 중 문화재 환수용으로 23억원을 모았고, 앞선 6점의 문화재 환수에 10억원 이상을 썼다. 그럼에도 제일 원칙은 '간섭하지 않는다'다. 게임 속 캐릭터에 빗대자면 충실한 '힐러'다. 구 총괄은 자신들의 역할은 '돈주머니'라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문화재 환수에 쓸 수 있는 비용을 정했고, 해마다 누적되는 구조라 예산 내에선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합니다. 경매에서도 빠른 대처가 가능하죠."
◇ "엄마, 나 게임으로 애국했어" 라이엇게임즈의 대표작 롤은 10~20대가 주로 즐긴다. 국내에선 롤의 인기를 따라올 게임이 없다. 롤은 262주(8월10일 기준) 연속 국내 PC방 점유율 연속 1위(게임트릭스 집계)를 달리고 있다. 세계적 인기에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정식 종목도 됐다.
게임만으로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차가운 시선도 여전하다. 게임을 좋아한다고 하면 돌아오는 마뜩잖은 시선에 게이머들은 지레 위축된다. 게임을 즐겼던 구 총괄 역시 마주했던 현실이었다. 그러나 롤 유저들에겐 딴 나라 얘기로 들릴 수 있다.
라이엇게임즈의 문화재 환수 후원은 전 국민에게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게임 유저들에겐 내가 낸 돈으로 우리 문화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직원들의 사기도 절로 오른다. 구 총괄은 게이머와 구성원들의 자부심을 문화유산 보호 활동의 원동력으로 꼽는다. 본사에서도 한국법인의 사회환원 사업을 높게 평가한다.
라이엇게임즈는 문화재 환수 지원 외에도 문화유산 보존·교육 사업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 유물 보존 처리 및 학술 연구 지원' '4대 고궁 보존 관리 지원' 서울 문묘와 성균관 및 전국 4개 서원의 건축 3D 디지털 측량 지원' '이상의 집 등 근대 문화유적 보존 지원' 등을 진행했다.
유저들과 한양도성·서촌 등을 체험하는 '티모 문화유산 원정대'도 있다. 침선장·화혜장·매듭장·금박장 등 무형문화재 보유자들과 게임 속 캐릭터의 한복을 구현해 온라인 전시회를 여는 등 무형유산 지원에도 앞장섰다.
그 덕분일까. 국내 게임 업계에도 문화유산 보호를 골자로 한 사회환원 활동 바람이 불고 있다. 구 총괄은 '선한 영향력'을 떨친 것이라 자평했다. 관심도가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냐는 질문엔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저희가 처음 시작했고, 성과도 1등이라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됩니다.(웃음)"
아직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가 많은 만큼 라이엇게임즈의 지원은 계속될 전망이다. 누적 기부금이 100억원을 돌파하는 시점에 라이엇게임즈의 사회환원 활동을 되돌아볼 여러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고정관념을 깨겠다는 게 회사 철학이에요. 앞으로도 라이엇게임즈의 '이색 행보'는 계속될 테니 지켜봐 주세요."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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