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 적었지만 사랑 많으셨던… “생각만 해도 아버지가 참 좋다”[그립습니다]

2023. 8. 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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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방이석(1933∼2023)
아버지(방이석)의 인천공고 시절 모습의 사진. 나(방민호 교수)는 이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스캔을 받아서 간직하고 있다.

유전이라는 게 있다. 자식은 어떤 것은 어머니에게 물려받고 어떤 것은 아버지에게 물려받는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한 나의 기질은, 어머니도 그렇게 주장하시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려니 했다.

어머니는 예산군 덕산면 북문리 사람이다. 어려서 수덕사에 자주 다녔고, 승려가 된 여성 문인 김일엽을 알았고, 자연스럽게 이광수를 읽으셨다. 외할아버지를 따라 시조를 외우고, 유성기판으로 노래를 듣고, 소설 ‘무쇠탈’을 읽으셨다. 그러니, 내가 나중에 ‘변질되어 버린’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학 대신에 문학을 택한 것은 외가에 흘러 내려오는 예술 애호적인 기질 때문이려니 했다.

나나 동생 인호와 달리 승호처럼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런 주장에 별다른 반론을 펴신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 집 다락방에는 펄벅의 ‘Letter From Peking(북경에서 온 편지)’ 같은 영문소설이 스무 권 넘게 처박혀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을 때, 그거 다 아버지가 읽었던 거냐고 여쭈니, ‘당근’이라 하셨다. 물론 정말 ‘당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으셨다.

아버지는 왜 이런 소설들을 읽었느냐 하면, 물론 하나는 영어 공부를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맙소사, 소설을 쓰고 싶었단다. 단지 쓰고 싶었던 것만 아니고 실제로 쓰기도 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까지도 하셨다고 했다.

태안에서 배 타고 인천으로 ‘도망가’ 인천공고를 들어갔는데, 첫날 럭비부 선배들이 교실에 들어와 아버지를 지목해서 ‘끌고 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중학교도 제때 못 들어가고 농사일로 단련된 체격이니 당연했을 것이다. ‘주경야독’, 아니 ‘주럭야공’으로 서울사대 체육과를 들어갔고, 홍성, 덕산, 공주, 대전, 부여 등지를 돌며 교직에 계셨다.

아버지는 특이한 체육 선생님이셨다. 아버지의 ‘교양’은 지금 솔출판사 대표이자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선배도 입증해 준다. 대전고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임 선배는 아버지가 학생들에게 손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 그때는 학생들이 우반, 열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체육시간에 열반 학생들이 골을 넣으면 아버지가 표나게 좋아하며 격려하셨단다.

마찬가지로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어머니한테 마루며 부엌으로, 뒤꼍으로 도망 다니며 혼나다가도 아버지만 퇴근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 하셨다.

이러니, 학생들이 아버지를 좋아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내가 불과 7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을 나르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고등학교에 가면, 위층 창문의 고등학생 형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어이, 방풍 아들! 오늘 반찬은 뭐냐?” 하고 반겨주곤 했다. 아버지를 ‘바람 풍’(風) 자를 붙여 방풍이라 한 것은, 바람처럼 빠르다고 칭찬을 해준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와, 더 많은, 여기에 못다 쓴 사연들을 남겨 놓고 아버지는 투병 1년 2개월 만에 수덕사 수목장에 고요히 잠드셨다. 오래지도 않은 올해 초의 일이다. 위암, 신장암에 이어 대장암, 요관암까지 아버지는 암 4관왕을 하면서도 의지 있게 삶을 잘 버티셨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좋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셨다, 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대신 사랑을 많이 베푸신 분, 어려운 사람에게 약한 분, 그러면서 의지가 강하신 분이셨다.

내 문학, 그리고 약자들도 공평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려니 한다.

아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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