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복수의 굴레, 슬픔의 굴레 [영화와 소설 사이]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8. 1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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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영화 <그을린 사랑> vs. 와즈디 무아와드 희곡 <화염>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닮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설과 영화가 빼닮았더라도 그 간극에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무수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영화와 소설 사이’는 저 사이(間)에 숨겨진 차이를 발견해 예술의 두 형식을 사유하는 연재기획입니다. 반드시 소설을 완독하고 영화를 다시 본 뒤 차이를 진단합니다. 매달 15일 온라인 연재됩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을 세 번 보았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가 묵직한 충격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처음을 기억합니다.

<그을린 사랑>의 서사에 담긴 힘은 다른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나약함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비상한 힘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지난 뒤에도 세계와 인간의 풍경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을린 사랑>은 21세기 비극의 정본같은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을린 사랑>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이 원작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관람한 드니 빌뇌브 감독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5년 뒤 연출해 선보인 영화로 알려졌습니다. 와즈디 무아와드는 레바논에서 태어났지만 10세 때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입니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지요.

두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결말을 알고 봐선 안 되는 작품이니 이 글을 읽기 전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딸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젊은 시절을 찾아 먼 길을 떠납니다. [티캐스트]
두 편지의 수신인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의 어머니 나왈이 사망합니다. 나왈의 공증인 르벨은 남매를 불러 나왈의 유언장을 읽습니다. 어머니 나왈은 딸 잔느와 아들 시몽에게 두 개의 편지를 남깁니다. 편지 하나는 너희의 아버지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너희의 형이자 오빠에게 주라는 내용이 담긴 유언장이었습니다.

평소 나왈은 남매에게 “너희 아버지는 전쟁 도중 죽었다”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아들 시몽은 자신에게 숨겨진 아버지와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어머니는 평범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딸 잔느는 놀라는 대신 어머니 나왈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왈의 모습이 찍힌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나왈의 고향으로 떠납니다. 잔느가 나왈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경악스러운 진실이 한 무더기씩 쏟아집니다.

어머니 나왈은 10대 시절 와합이란 남성과 연인이었습니다. 둘은 사랑했습니다. 와합은 난민이란 이유로 지역 주민들에게 총살을 당합니다. 그때, 나왈의 몸에선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왈은 홀로 낳은 아들 니하드를 고아원에 입양 보내게 됩니다.

이후 슬픔을 숨기고 살면서 고아원을 전전하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니던 대학생 나왈은 난민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민병대와 마주합니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복수심이 차오른 나왈은 가정교사로 잠입해 민병대 지도자를 사살합니다. 이후 나왈은 감옥 크파르 리야트에 수감된 혁명가의 모습으로 주민들에게 기억됩니다. 잔느와 시몽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지요.

무려 15년간 감옥에 투옥됐던 나왈은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에게 주기적으로 성폭행을 당합니다. 아부 타렉에게 나왈은 ‘72번 창녀’로 불렸습니다. 성폭행을 당할 때마다 노래를 불렀던 나왈은 감옥에서 ‘노래하는 여인’으로도 불렸습니다. 나왈이 노래를 부른 이유는, 아부 타렉이 아무리 자신을 유린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저항의 상징이었지요. 그 노래가 아부 타렉의 화를 돋구어 매일 밤 비명은 반복됐습니다. 나왈은 결국 임신하고 아부 타렉의 아이를 출산합니다.

이 영화는 ‘나왈의 아이와 친부는 무엇인가’라는 추적의 여정에서 관객을 세 번 놀라게 합니다. 10대 시절의 연인 와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의미하는가 싶다가, 아부 타렉에게서 낳은 아이를 의미하는가 싶어지지요. 그러나 둘 다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요. 훗날 시간이 흘러, 감옥에서 나온 나왈은 자신에게 벌어졌던 운명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짐승같은 아부 타렉이 바로, 자신이 10대 시절 고아원에 입양 보냈던 아들 니하드였음을요. 나왈의 잃어버린 아기가 고문기술자가 되어 저항가가 된 어머니 나왈을 성폭행한 겁니다. 그것이 근친상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죠. 아부 타렉이 나왈의 아들이자 쌍둥이 아이들(잔느와 시몽)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영화는 역겨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아부 타렉과 재회한 어머니 나왈(왼쪽)이 충격을 받아 말을 잃어버리자 잔느가 놀라는 장면.
피에로의 코
원작 희곡 <화염>은 나왈의 삶을 추적하는 남매의 뒤를 따라갑니다. 중심인물은 비밀스러운 어머니 나왈입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원작과 다소 결이 다릅니다. 영화는 나왈, 잔느, 시몽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한 아이, 한 남성을 부각시키지요. 니하드로 태어났지만 이름을 잃어버렸고, 결국 고문기술자가 되었던 아부 타렉 말입니다. 영화는 분노에 찬 눈빛의 소년 니하드의 얼굴을 카메라로 비추면서 영화를 시작하고 나왈의 무덤을 찾는 성인 아부 타렉을 멀리서 카메라로 잡으며 영화를 끝맺습니다. 나왈이 아부 타렉을 니하드로 확신하는 장면도 두 작품에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지요.

영화에선 아들 니하드를 알아보는 나왈의 표지가 ‘아킬레스건 뒤에 새긴 3개의 검은 점’이었습니다. 나왈의 산파가 뾰족한 바늘을 이용해 갓난아이 니하드의 뒤꿈치에 점을 세 번 찍어 새긴 문신이었지요. 감옥에서 풀려나고 쌍둥이 남매가 성장하자 평온해진 나왈은 딸 잔느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아부 타렉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아부 타렉은 나왈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왈은 아부 타렉의 뒤꿈치 문신을 보고 난 뒤 니하드에게 찍은 문신임을 확신하고, 이로써 끔찍했던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이 자신의 첫 아이 니하드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침묵하지요.

원작 희곡 <화염>에선 나왈이 니하드를 알아보는 장면이 영화와 다르게 표현됩니다. 희곡에서 나왈은 니하드를 입양시키기 직전 아기의 기저귀 안에 ‘피에로의 코’를 넣어뒀습니다. 그건 나왈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아기의 표식이었죠. 뒤꿈치에 새긴 문신보다 잃어버릴 확률이 높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니하드는 성인이 되어서도 피에로의 코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작자 나즈디 무아와드는 왜 하필 피에로의 코를 넣어뒀을까요. 희곡 속 니하드/아부 타렉은 법정에서 말합니다. “조그마한 빨간 코였죠. 조그마한 피에로 코였습니다. 그게 뭘 뜻할까요? 제게 존엄성은 제게 생명을 준 존엄성이 남긴 일그러진 얼굴인 겁니다. 이 찌푸린 얼굴은 절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170쪽)

피에로의 코는 어린 니하드/아부 타렉의 운명을 드러내는 슬픈 사물입니다. 피에로를 생각해볼까요. 피에로는 세계 수많은 광대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광대라고 하면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같지만, 피에로는 사실 ‘슬픈 얼굴을 한 광대’를 의미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원에 버려졌고 적들에게 납치되어 저격수로 길러진 니하드. 하지만 다시 적에게 생포되어 감옥의 여성을 고문하는 기술자로 성장한 범죄자 아부 타렉. 그의 운명의 표정은 피에로처럼 일그러져 있습니다. 니하드/아부 타렉은 슬픈 피에로를 닮았습니다. 피에로의 코는 마치 그의 운명의 상징처럼 인식됩니다.

그 끔찍한 감옥에서,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은 나왈이 어머니인지 모른 채 성폭행하면서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계속 노래를 불러.” 감옥의 수많은 여성들은 부서지고 찢겨지는 고문 중에도 나왈의 노래에 의존했습니다. 아부 타렉은 ‘나왈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성폭행했지요. 그런데 정작 성폭행을 마친 뒤엔 ‘노래를 그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부 타렉의 저 대사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희곡에 자세히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부 타렉이 나왈의 노래를 멈추게 하지 않은 건 나왈의 목소리가 생모(生母)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나왈의 목소리에 아부 타렉을 끌렸던 겁니다. 바로 눈앞의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끌렸던 겁니다. ‘72번 창녀’의 목소리는 아부 타렉이 10개월간 나왈의 뱃속에서 들었던, 익숙했던 그 목소리였습니다.

어머니의 유서를 읽고 있는 잔느(왼쪽)와 시몽.
콜라츠 추측과 ‘1+1=1’
나왈의 딸 잔느의 직업은 희곡에선 수학과 교수로 나옵니다. 영화에선 수학과 대학원생 조교이지요.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정서도 이성과 합리의 논증이 필수적인 수학입니다. 수학은 명확한 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삶이란 게 언제나 명확한 논증과 확실한 답이 있던가요. 잔느와 시몽이 찾아가려는 답도 그렇습니다. 남매가 느끼는 삶과 운명의 채도는 선명한 명제들의 나열인 수학보다 불투명합니다.

잔느가 수업 도중 잠시 언급하며 스쳐 지나가는 수학계의 ‘콜라츠 추측’은 영화 <그을린 사랑> 주제를 암시하는 하나의 복선이 됩니다. 수학에서의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는 결국 다음과 같은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을 뜻합니다. 만약 자연수가 짝수라면 2로 나누고, 홀수라면 3을 곱한 뒤 1을 더합니다. 이 방식을 계속 하면 반드시 1이 됩니다. (가령 34는 ‘34→17→52→26→13→40→20→10→5→16→8→4→2→1’이 됩니다.) 콜라츠 추측이 ‘추측’인 이유는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잔느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내용이 어떤 경우든 1로 결론이 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잔느와 시몽은 아버지 1명, 형/오빠 1명을 찾아, 즉 ‘2명’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남매가 찾아낸 세상의 함수에서 ‘1+1’의 정답은 ‘2’가 아니라 ‘1’이었지요. 콜라츠 추측은 남매의 오빠 니하드, 남매의 아버지 아부 타렉이 동일인이라는 복선이었던 것입니다. 시몽이 ‘1+1=1’이라고 말하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잔느가 입을 틀어막으며 내지른 비명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나왈의 아들 소년 니하드는 고아로 자라 레바논의 최전선으로 떠납니다.
성모의 사진을 붙인 AK소총
니하드가 아부 타렉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영화에서 자세하지 않습니다. 희곡을 보면 그의 전사(前史)가 자세합니다. 니하드가 끔찍한 악인(아부 타렉)이 되기를 선택했던 이유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을 훗날 알아봐주길 바라서였습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악마가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범하는 모순의 미로에 갇혀 버렸습니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니하드가 악인 아부 타렉이 되어가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줍니다.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도 간의 살육전을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전쟁의 부당함과 반전 메시지를 분명히 합니다. 성모의 사진을 붙인 AK 소총의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동네 아이들이 끔찍하게 죽는 장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난민이 산 채로 불태워지는 장면까지 영화에 자세합니다.

원작 희곡에는 고대 신화와 성경 대목을 차용한 부분도 눈에 띕니다. 강에 버려진 쌍둥이 아이를 키우려는 수감자 나왈의 간호사는 구약성경 속 모세를 구해준 파라오의 딸을 떠올립니다. 니하드/아부 타렉의 운명이,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의 생애와 유관하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버스에 탑승한 난민을 산 채로 태워죽이는 민병대 공격 이후 슬픔에 잠긴 나왈.
니하드와 아부 타렉이 동일인이라는 점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사실 그의 삶을 ‘악하다’는 한 마디로만 규정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아부 타렉은 더럽고 역겨운 전범이지만 그의 본 모습인 니하드는 전쟁의 굴레에 휘말린 소년이니까요. 그는 슬픔을 지나 복수의 감정에 가닿았고 결국 다시 슬픔으로 귀결됐습니다. 이것이 인간 운명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는 아닐까요.

아부 타렉은 신분을 세탁한 뒤 캐나다에 숨어 살아가다가 한 여성이 건네준 두 개의 편지를 받습니다. 자신의 동생이자 딸인, 잔느가 건네준 편지였습니다. 자신의 이름 ‘아부 타렉’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뜯어봅니다. 한 편지의 수신인은 아부 타렉이었고, 또 다른 한 편지의 수신인은 니하드였습니다. 두 개의 편지는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에게 보내는 ‘72번 창녀’ 나왈의 칼끝같은 복수이자, 아들 니하드를 향한 아득한 연민의 서였습니다.

이제 글을 끝맺을 시간입니다. 희곡엔 없는 장면입니다.

각색된 여러 부분 가운데 제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남매로부터 편지를 받은 아부 타렉이 나왈의 무덤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자신이 직접 각색한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아부 타렉에게는 참회의 기회를, 나왈에게는 애도의 시간을 주고자 했던 건 아닐까요. 아부 타렉은 용서받을 수 없고 나왈은 용서할 수 없지만, 아부 타렉의 참회와 나왈의 애도는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와즈디 무아와드 희곡 ‘화염’
※ 다음달에는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와 이 영화의 원작소설 릴리안 리 작가의 <사랑이여 안녕>을 비교합니다. [영화와 소설 사이]는 매달 15일 온라인 연재됩니다. 하단 기자페이지에서 ‘+구독’을 누르면 쉽고 빠르게 기사를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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