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이었던 24년 차 교사는 왜 교단을 떠나려 하나
2000년 9월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로 24년 차 사회 교사다. 교편을 잡는 동안 학교 안팎에서 꽤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2013년에는 교사가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자기 사연을 들어 생생하게 쓴 책 〈마음 일기〉를 펴냈다.
이 책은 한 교사의 분투기이자, 교육 현장 르포이자, 학생·교사·학부모에게 띄우는 편지였다. 100차례 정도 강연을 다닐 만큼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교사는 교권 침해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휴직 중이다. 전라남도의 한 고교 교사 장혜진씨 이야기다.
2년 전 3월, 새 학교에 부임했다. 한 학생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개학 첫날부터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학생이었다. 지각·조퇴·결석을 계속했고 학교에서도 수업 중에 무단 이탈했다. 조퇴하게 해달라고 조를 때 '엄마에게 전화할 테니 보내달라'고 할 만큼 가정의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따라 하필이면 오전 수업이 연달아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이 되었지만 그 학생은 학교 인근 편의점 앞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 학생을 달래는 과정에서 장혜진씨는 폭행을 당했다. 주먹으로 뺨을 맞았고, 머리채가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폭행과 승강이는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공무상 병가로 휴직한 상태다.
끔찍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최근 서울 S 초등학교 교사 사건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겪은 교권 침해 사례를 추가로 폭로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한 것만이 아니었다. ‘교사’ 장혜진씨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는 S 초등학교 사건 이후 언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학교 내 최고 ‘관리자’인 교장·교감의 문제였다.
그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학교 내에서 평교사와 교장·교감은 완전히 다른 집단이며, 엄격한 상하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교장·교감이 어렵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대응하면 교권 침해 등 학교 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장혜진 교사 역시 교권 침해 과정에서 교장·교감의 ‘무성의한 대응’ 탓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S 초등학교 사건은 추슬러가던 그의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마음 일기〉 저자인 자신이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교권 침해 이야기부터 해보자. 2021년 새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그런 일을 겪은 건가?
첫날부터 충격을 받았다. 학교가 세렝게티였다. 성적이 떨어지고 문제가 있는 학생이 많은 학교였다. 수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반 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뒷문을 확 열고 ‘○○야, 나와라’ 하는 분위기였다. 통제가 전혀 안 되는, 통제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사전에 그런 분위기를 알 수 없었나?
3월을 교사들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개학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되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처럼 새로 부임한 교사는 또 학교를 파악해야 한다. 교사들은 저마다 초긴장 상태에 놓인다. 처음에 아이들과 면담을 해보니, 우리 반의 3분의 1 이상이 우울증 증세가 엿보이더라. 공부를 못하거나, 가정환경이 불우해 자라면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 학생은 어떤 학생이었나?
경제적으로는 집안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머니와 그 아이에게 폭력을 많이 행사한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무기력하고, 아이는 그런 어머니를 거부했다. 그날도 아버지가 학교에 왔는데, 내 눈앞에서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더라. 내가 그 아이를 안고 아버지에게 '제발 그만 때리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충격이 컸겠다.
그날이 3월 둘째 주 목요일이었는데, 금요일 밤부터 내 상태가 악화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고, 극단적 생각을 하게 되더라. 사실 나는 이미 수업 첫날부터 아이들에게 교권 침해를 어마어마하게 당한 상태였다. 내 앞에서 입간판을 발로 차고 침을 퉤 뱉고 지나가거나, 수업 시간에 말도 없이 자기보다 약한 애를 화장실에 끌고 가려는 학생이 있었다. 그걸 막으면 계속 떠들면서 수업을 방해했다.
당시 교장과 교감의 처신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학교의 관리자로서 장·감(교장·교감)은 마땅히 나를 보호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장은 출장 중이었고, 교감이 책임자였다. 그날 나는 내가 겪은 일을 분 단위로 기록해 메모를 남겼고, 이를 교내 메신저 등을 통해 교감에게 보냈다. 그런데 당일에 아무런 연락이 없더라. 다음 날 끙끙 앓다가 교감에게 전화해서 학교에 못 나가겠다고 하니 ‘학교에 못 나올 정도냐’라고 되묻더라. 게다가 이런 사건이 생기면 교장이 즉시 교육청에 보고하게끔 돼 있는데,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교장은 모르고 있었다. 교감이 보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교감과 교장은 이후에 어떻게 대응했나?
교장은 뒤늦게 알고,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상 도와준 것은 없었다. 도교육청 보고부터 공무상 병가 처리까지 거의 내가 했다. 공무상 병가 처리의 경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규정이 까다롭다. 그때 나는 이미 정신과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던 그 교감은 그해 2학기에 다른 학교로 가서 교장이 되었다.
학교 관리자들이 사실상 아무런 대처를 안 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원지위법(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 매뉴얼 등에 상세히 나와 있다. 사건 발생 즉시 피해 교원을 격리·보호하고, 교권 침해 내용을 조사해야 한다. 학교장은 관할 교육청에 연락을 취해야 하고, 교권보호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교육활동 침해 학생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런 절차가 있음에도 교장과 교감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사실이 학교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지 사건 이후에도 동료 교사와 학생으로부터 ‘장 선생님, 이 업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저 오늘 좀 늦어요’ 하면서 연락이 계속 왔다. 심리적으로 더욱 불안해지게 되더라.
한동안 학교에도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겠다.
교원지위법 제16조(교육활동 침해행위의 축소·은폐 금지 등)에 이렇게 나와 있다. ‘각급 학교의 장은 교육활동 침해행위의 내용을 축소하거나 은폐해서는 아니 된다.’ 게다가 교감은 피해 교원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했다. 직무 유기라고 본다.
그 학생은 어떻게 됐나?
내가 관할 교육청에 연락하자 장학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느냐며 놀라더라. 결국 그 장학사가 학교에 지시해서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렸고 퇴학 처분됐다. 이후에 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자신이 교권 침해 피해자가 되었지만, 몇 해 전 장혜진 교사는 동료 교사의 교권 침해 사건을 도운 조력자였다. 담임이 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사였다. 자해 이력이 있던 아이가 수업에 안 들어오려 하기에 다그쳤더니 욕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교사는 폭행을 당했고 아이는 부상을 입었다.
문제는 이 학교 교감의 대응이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소집할 사안이었지만 아이가 부상당했기 때문에 자칫 아동학대 사건이 될 수 있다며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고 권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여는 대신 수업 거부로 학생만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이를 돕는 과정에서도 장 교사는 학교의 ‘장·감'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장·감은 왜 교권보호위원회 소집을 꺼릴까.
학생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지면 학내 봉사나 사회봉사가 대부분이다. 처벌 수위가 세지 않다.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면 징계 수위가 대체로 높아진다. 그럼 본인들에게 리스크가 커진다. 퇴학이나 강제전학 처분이 내려지면 학부모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교육청에 항의하고 행정심판 소송을 제기한다. 그럼 학교 관리자로서는 엄청나게 피곤해진다. 교육청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커지는 게 싫으니까 징계 수위를 낮추라고 하면서 학생을 그 학교에 다시 돌려보낸다. 그럼 어떻게 되겠나. 그 학생은 더 의기양양해져서 학교를 휘젓고 다닌다. 그런 꼴을 보는 교사와 다른 학생의 심정이 어떻겠나.
학생 인권이 너무 강조돼서 이렇게 된 측면이 있나.
전혀. 오히려 학생 인권을 강조한 덕에 교권 침해가 줄었다고 본다. 학생 인권이 별건가. 아이들 두발 자유화하고 핸드폰 마음대로 빼앗지 말라는 것 아닌가. 학교 관리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들을 단속하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9시 등교가 되고 나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확실히 덜 싸우게 됐다. 그 전에는 정규수업 시간이 아닌데도 아이들을 오전 7시30분까지 등교시켜 수업료 받고 교재 사게 해서 억지로 보충수업을 했다. 9시 등교 이후 교사는 칼같이 지각 체크만 하면 됐다. 교사의 일이 단순해질수록 갈등이 줄어든다.
잘못한 학생을 정당하게 처벌할 수 없는 현실도 문제 아닌가.
그렇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잘못한 아이는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 여기서 또 민원 문제가 등장한다. 아이가 처벌받으면 집요하게 민원을 넣는 학부모가 있다. 학교→교육청→국가인권위원회 순으로 넣는다. 학교도 공무원 조직이라 민원이 생기면 대응을 해야 한다.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다. 교육청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학교의 관리자를 못마땅하게 여길 테고. 그러나 장·감이 민원을 너무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귀찮고 힘들더라도 원칙대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학교가 바로 선다. 거꾸로 그런 원칙은 교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촌지 받고, 성추행하는 교사들은 엄격하게 징계해야 한다. 교사에게 관대한 학교가 학생에게 엄격할 수 있을까.
장·감 입장에서는 어려운 문제겠다.
학교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는 힘이 약한 쪽으로 흐른다. 관리자가 원칙을 무시하고 평교사를 찍어 누르면 그 스트레스가 학생에게로 흐른다. 그러면 그 학교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쉽다. 다시 말하지만 학생 인권이 보장되는 학교일수록 교사와 학생 사이가 좋다. 위에서 관리자가 평교사를 찍어 누르지 않기 때문이다. 평교사들 역시 더 이상 참고 넘어가면 안 된다. 관리자들이 정신 차리게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당당하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S 초등학교 교사 사건 이후 젊은 교사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세월호 때 경기도 안산에서 근무했다. 당시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교사가 참 많았는데, 그때는 젊은 교사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면 말렸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인간 대 인간으로 느끼는 교감, 그 행복감을 맛보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지금은 아니다. 학교에서 부장교사가 되면 수당이 얼마인 줄 아나. 월 7만원이다. 그러니까 선배 교사들은 보직을 안 맡으려 한다. 젊은 교사들이 거의 다 떠맡는 추세다. 부장 보직에 담임까지 맡으면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데에는 이런 현실이 있다. 지금 분노한 교사들이 들고일어나는 것, 나는 이게 발전이라고 본다. 우리 교육은 바닥까지 떨어져볼 필요가 있다.
가슴 아픈 질문인데, 교사로서 자신은 실패했다고 보나.
난 실패했다. 교사로서 겪은 모든 기억이 나를 덮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하면서 교사로서 내 삶을 상징할 기억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영지(가명)라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 아빠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형제끼리 어렵게 사는 아이였다. 첫 소풍을 갔는데 이 아이가 내 김밥을 싸왔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달걀을 갖고 왔다. 알고 보니 오리알이었다. 동네에서 어르신이 귀한 거라고 줬는데, 나에게 준 거였다. 돌이켜보면 그 오리알이 내 교직 생활을 상징하는 물건 같더라. 이렇게 사랑을 받은 교사였지만, 나는 결국 실패했다.
장혜진씨는 지금 교단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처럼 아픈 마음으로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나라의 교단에 설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이대로 학교에 돌아가면 자신의 삶이 너무 처참해질 것 같다고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수업이었다. 사회 교사로서 시험에는 안 나오지만,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칠 때 행복했다. 예를 들어 전세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는 수업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수업을 하고 나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다. 그런 수업 후에 교실 문을 닫고 나오면 등이 찌릿찌릿할 만큼 뿌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내 교사 업무의 20%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잡무다. 나는 교사로서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 슬펐다.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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