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트라우마 벗고 ‘편의적 공존’ 유지 … 中과 시시비비 따져야” [세상을 보는 창]

박희준 2023. 8. 1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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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前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국내갈등 무릅쓰고 강제동원 등 해결
尹정부에 對日채권 같은 외교적 자산
해양감시기구 등 활용해 오염수 대응
日 수산물 수입제한 조치 지속 바람직
文정부 ‘사드 보복’ WTO 제소도 못 해
中에 여러 어젠다 갖고 말 많이 붙여야
한·미·일 정상회의, 對中압박 논의 전망
향후 한·중 관계 어떻게 할지 고민 필요

“일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과 갈등을 관리하면서 협력하는 ‘편의적 공존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미·일 3국 정상회담 후 중국과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일본은 분명히 결과를 중국 측에 설명할텐데···. 중국에 여러 어젠다를 가지고 말을 많이 붙여야 한다.”

제78주년 8·15 광복절을 맞았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경색된 한일관계가 해빙 무드다. 18일에는 미국 대통령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3국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가 제78주년 8·15 광복절을 앞둔 지난 10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한·미·일 정상회의와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등 외교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상외교가 국력의 산물이고 국력은 국민이 만든 것인 만큼 대통령 개인 능력을 부각하기보다 성과와 의의를 홍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정탁 기자
한일 간에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이달 말로 예상되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강제징용피해자 배상문제부터 걸림돌이다.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고차방정식을 푸는 외교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중국·일본·북한 문제를 두루 경험한 이현주(67) 전 국제안보대사가 떠오른 이유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북한 신포사무소 초대 대표, 주미대사관 총영사와 참사관, 주중대사관 정무공사, 주오사카 총영사 등을 지냈다. 큰 관운은 없었지만 풍부한 외교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재야의 고수라고나 할까. 지난 10일 세계일보에서 그를 만나 다양한 외교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대통령이 ‘역사적 사죄’로 국민 감동시켰으면···”

―우리에게 3·1절과 더불어 8·15광복절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과 일본은 매년 역사인식에 대해 비슷한 수사를 내놓는다. 위안부할머니나 강제징용노동자 같은 희생은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대통령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과거 역사 속의 책임에 대한  ‘역사적 사죄’를 통해 국민을 감동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국민이 어려울 때 국가와 정부가 아무런 보호를 해주지 못 한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히로시마 원폭 피해 동포들을 만나 ‘슬픔과 고통을 겪는 현장에서 국가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언급하기는 했다. 정부가 자국민에게 역사문제를 사과하고 배상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제법 있다.”

―대일외교가 우리 모든 외교의 출발점이라고 한 적 있던데.

“모든 정부가 들어서면 북한 또는 일본 문제를 꺼내든다. 국민에게, 미국에게 두 문제로 매력 경쟁을 하는 셈이다. 미국은 상수니까 건드리지 못하고, 북한과 일본 문제는 왔다갔다한다. 그래서 출발점이다.”

―일본 문제를 국내 정치에 편리하게 이용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일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 일본에 대한 이해를 표명하면 금방 토착왜구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반일은 아주 안전한 길이다. 반일하면 애국자, 지식인처럼 보이는 거죠.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이 친일이나 반일로 정반대로 나타나는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대한 질시가 두려움과 혐한으로 표현된다. 그렇더라도 일본 내 극히 일부 극우가 그렇지 다수는 그렇지 않다.”

―국제정치 구도 상 일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은 미국·중국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지만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과 일본 문제를 논의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미국에 안보와 경제를 밀접하게 의존하는 공동운명체다. 안전과 번영을 대가로 미국에 속주세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일 간에 신뢰관계가 가능하다면 대단히 유용한 안보조건이 될 수 있다. 우리 국력이 커질수록 상호신뢰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 대일외교 최대 목표치는 외교갈등과 현안을 잘 관리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분야에서 협력하는 ‘편의적 공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본 이해가 ‘토착왜구’로 비판받는 현실···反日은 안전한 길”

―일본도 한국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외교가 이념화했고, 일본에서는 2000년대 초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세계화 정책과 관료 통제로 외교가 정치화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적 ‘정치외교’가 외교적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고 극한적 대립을 초래했다고 본다. 윤석열정부 노력으로 이뤄지는 양국간 관계개선도 일시적일 수 있다. 미국 압력으로 갈등이 수면 밑으로 잠복했지만 양국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급변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외교에서는 해결만이 해법인 건 아니다. 갈등이 악화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도 유력한 해결책이다. 한국이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양국관계를 능동적으로 잘 활용하는 외교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달말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라는 현안이 있다.

“외교기술에는 협상과 합의 외에도 대안 제시가 있다. 우리로선 오염수 사안은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했어야 한다. 일본이 오염수를 방류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문재인정부에서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 결과를 두고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이제와서 ‘방류 시기는 일본이 결정할 문제’라고 할 건 아니다. 윤석열정부 출범 직후, 또는 늦었더라도 지난 3월 윤 대통령의 방일 이전, 특히 강제징용 3자 배상안 발표 이전, 오염수 방류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직간접적으로 밝히고 대책을 공개적으로 논의했어야 한다. 시기를 놓치다보니 다른 현안과 연결돼 버렸다. 시기를 놓치거나 순서가 바뀌면 선택과 수단이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

―현재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얘기인가.

“사후적 대안으로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에게 우리 전문가의 방류 감시기구 참여를 요구했다. 더불어 사안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정기간 태평양 도서국 및 주변국들과 가칭 ‘안전감시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거나 해양환경 감시기구를 활용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 안전에 관한 한·중·일 3국 협력을 주도하고 IAEA에서 계속 검증할 것을 요구하는 등 의제화 할 수도 있다. 일본 수산물수입제한 조치는 계속 유지해야 한다. 섣불리 해제했다가 나중에 논리적·과학적 모순에 빠질 수 있다.”

―한일관계와 관련해 문재인정부가 국민 눈치만 봤다면, 윤석열정부는 너무 외교적 해결만 강조하는 건 아닌지.

“국익을 달성하는 외교전략과 국내 여론이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론에 따르는 외교를 자유민주주의 외교라고 할 수 없다. 외교에 관한 여론은 자유민주주의체제 내에서도 비교적 조종이나 조작이 쉽다. 정치권력 의도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정부 외교는 국민 눈치를 본 게 아니라 의도, 즉 정책 자체가 이념화되었다. 윤석열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은 옳지만 일본문제와 관련된 여론에 너무 둔감했다. 자유민주주의 외교는 내부 설득 노력이 부가적으로 필요하다. 현정부 외교가 비판받는 부분 아닌가.”

“역사적 원한 얽힌 폴란드·우크라이나는 ‘정략적 협력’”

―강제징용피해자 3자 배상 방안에 대한 평가는.

“폭탄돌리기를 하다가 윤석열정부에게 차례가 온 것이다. 마치 수학시험에서 정답은 썼는데 풀이과정을 안 써서 감정받았은 것과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그 방식 외에 뾰족한 수단이 없다. 일본을 강제할 수 없지 않은가. 개인에게도 진정한 사과를 강제해 받을 수 없는데 국가는 더욱 그렇다. 애초 우리 국내에서 해결할 문제인데, 외교문제로 번지도록 방치한 측면이 있다.”

―동북아재단 사무총장 재임 시절 ‘일본 프레임 깨기’를 시도했다던데.

“일본 프레임은 일본이 주장하는 용어나 논리적 틀을 그대로 원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식민사관을 비판한다면서 일본의 식민역사관 틀이나 방법론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이 만든 용어를 그대로 썼다. 언어가 내용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은가. 결국 굳어진 프레임이나 열등감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실력이 필요하다. 프레임에서 벗어나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고 한국이 일본을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방문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언급한 글을 봤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변방’을 뜻한다. 13세기경부터 폴란드 지배를 받다가 1991년 독립할 때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피지배자인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 폴란드에 역사적 원한이 깊다. 서로 얽힌 역사적 원한은 처절하고 피비린내 난다. 1차대전 종료 직후 신생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독립군이 영토전쟁을 벌였고, 2차대전 중에는 접경지역에서 주민 간에 대살육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두 나라는 원한을 덮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맞서 협력하고 있다. 러시아 침략과 잔혹한 압제의 기억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도  과거사 논쟁을 계속 하면서도 안보를 위한 ‘정략적 협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는.

“외교는 과시다. 내용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한다. 중국 압박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해 발표할 것으로 예상한다. 3국간 전통적인 외교 방식은 미국이 연출하고 일본이 판을 깔고 우리는 연기하는 식이었다. 이제는 우리 국력이 커져 우리가 기획, 제작, 연출, 연기하는 역할도 가능하다. 그러려면 외교적 창의성이 필요하다. 외교 어젠다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미국한테도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제기하는 것이다. 현정부가 국내정치적 갈등을 무릅쓰고 강제징용 배상이나 오염수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일본에 일종의 채무를 안겼다. 중요한 외교적 자산으로, 일종의 대일채권이다. 3국 정상회담 후 중국과는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해야 한다. 일본은 분명히 사후에 결과를 중국 측에 설명할텐데 우리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日, 3국 정상회담 결과 中에 설명할텐데 우리는 어떻게?”  

―미국이 공동성명에 한국과 일본이 공격받았을 때 상호 협의할 의무를 명문화하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이 강하게 요구하면 한국이 거부하기에는 너무 벅찬 문제다. 현실적 흐름에 따르면서도 이익을 챙기고 손해를 관리하거나 비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내부적으로 일본군의 한반도 재진출 같은 허수아비론적 비판을 사전에 차단하고 반론해야 한다. 모든 것은 상호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에 한국군이 진출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지속되는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헤징(hedging·위험회피)의 시대가 가고 진영의 시대가 도래했다. 사실 헤징은 인도나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같이 지정학적 여건과 국력이 맞아떨어지는 나라만 가능하다. 한국은 미국이라는 담장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 전제 안에서 대중외교를 하는 게 불가피하다.”

―구체적으로 대중외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에 시시비비를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정부 시절 사드 보복에 대해 한국은 국제무역기구(WTO) 제소도 못했다. 중국을 바쁘게 만들 호기를 잃었다. 중국이 보복조치를 해도 한국은 보복하지 못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했던 한국의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중국에 대해서는 여러 어젠다를 가지고 말을 많이 붙여야 한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중국대사의 ‘중국 패배 베팅’ 발언 파문이 있었다.

“권위주의 독재체제 국가의 외교관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행태다. 국제적으로는 삼류 외교지만, 자국에서 일류가 된다. 외부로 비치는 수치보다 내부 처벌이 무서운 법이다. 전랑외교는 전랑 행태, 벼랑끝 전술은 벼랑끝 행태일 뿐이다. 우리의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그동안 주요국 대사를 과도하게 예우한 결과다. 베이징에서 우리 외교관 활동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너무 심하다.”

“정상외교는 국민이 만든 국력의 산물···개인 능력 부각 말아야” 

―윤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활발한데도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듯하다.

“정상외교를 활발히 한다기보다는 국제적으로 정상외교가 활발해지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국력의 산물이고, 국력은 국민이 만든다. 정상외교에 대한 정부 홍보는 외교적 성과와 의의 보다 늘 대통령의 개인 능력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국민의 ‘냉소적 비판’을 부른다. 한국에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외교 스타’가 되지만 5년만 지나면 도로묵이다. 대중연예인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대통령들은 거기에 집착한다. 5년 주기로 전문가 집단이 카르텔화해서 부나비처럼 이합집산한다. 외교관료도 영향을 받다보니 지금은 아예 미리 줄을 설 정도다. 그것이 민주주의 외교의 위험한 측면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우리 외교의 방향은.

“움직이는 목표를 겨냥할 때에는 내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더욱 잘 잡아야 한다.  G8이니 하는 거대담론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G7이든 G8이든 상상 이상의 부담과 비용을 동반한다. 한국은 그 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 비용은 먼저  발생하고 이익은 나중에 돌아오는 법이다. 정치화·이념화하지 않고 전문적 영역의 의견을 존중하고 정권교체 영향을 덜 받으면서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외교관료나 외교전문가는 줄을 세우려고 하지도 말고 줄을 서지도 말아야 한다.국력을 튼튼히 하는 게 최선의 외교다. 대통령은 외교 조직과 제도 등 외교 생태계를 대폭 정비하는 게 남길만한 성과가 될 수 있다.”

―후배외교관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은. 

“외교의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외교의 기본은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개념이 명확하고 상호 공유해야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타협이 가능하다. 개념이 불명확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끝없는 갈등과 마찰을 빚을 뿐이다. 두번째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외교에서 창의력은 새로운 또는 연관되는 ‘논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 제시한 어젠다는 당연히 자신이 주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영어 등 외국어는 당연하고 4차 산업혁명, 신냉전과 신경제 질서를 모색하는 시대에 걸맞는 역사지식과 다면적 지식이 필요하다. 찬밥을 먹고 있어도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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