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0위권 수직 점프’ 중견그룹 달려드는 HMM 인수전
중견그룹 각축전
대기업은 높은 몸값·영구채 규모 부담에 손사래
후보기업 자금력·업황 불확실성 변수될 전망
[비즈니스 포커스]
한국 유일의 국적 원양 컨테이너 정기 선사인 HMM의 매각 절차가 본격화했다. 자산 규모만 26조원에 달해 시장에선 어느 기업이든 인수에 성공하면 재계 순위를 단숨에 10위권 내로 수직 상승시킬 수 있는 마지막 매물로 꼽힌다.
매각 공고가 나온 지 1주일 만에 SM·하림·LX·동원·글로벌세아 등 5개 그룹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8년 만에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는 HMM이 누구 품에 안길지 주목된다.
아세아상선→현대상선→HMM, 부침의 역사
HMM은 1976년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세운 아세아상선이 모태다. 1970년대 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한 3척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발주처가 찾아가지 않자 갈 곳 없어진 배 3척을 가지고 직접 해운 회사를 차린 것이 시작이었다.
골칫거리였던 미인도 VLCC 3척은 정 명예회장이 해운업을 시작할 수 있는 든든한 자산이 됐다. 정 명예회장의 발상의 전환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아세아상선은 1983년 현대상선으로 사명을 바꾸고 한국 대표 해운사로 성장했다.
한때 현대그룹의 전체 매출에서 70%를 차지할 만큼 핵심 계열사였지만 해운업 장기 불황으로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2016년 그룹에서 분리돼 KDB산업은행이 대주주인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2017년 한진해운과 함께 한국 1·2위 해운사였지만 해운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한진해운이 파산하면서 1위 자리를 물려받았다. 2020년 현대상선에서 HMM으로 사명을 바꿨다.
8년 만에 민영화 본격화
HMM의 대주주인 KDB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는 7월 20일 HMM 경영권 공동 매각을 위한 공고를 내고 본격적인 매각 절차에 돌입했다.
매각 대상 지분은 KDB산업은행(1억119만9297주)과 해진공(9759만859주)이 보유한 HMM 주식 1억9879만156주에 더해 영구전환사채(CB) 등에서 향후 주식으로 전환할 2억 주를 합쳐 총 3억9879만156주다. 그간 HMM 매각의 관건은 영구채였다.
KDB산업은행과 해진공은 매각 절차 개시를 계기로 보유한 2조7000억원 정도의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영구채 중 1조원 정도를 주식으로 전환·매각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전환 시점은 올해 10월이다.
이에 따라 1조원 규모의 CB와 BW가 주식으로 전환되면 총 2억 주가 신주로 발행돼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 희석이 불가피해졌다. 그 결과 2021년 5만원까지 치솟으며 투자자들 사이에서 ‘흠슬라(HMM+테슬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HMM의 주가는 현재 1만7000원대로 떨어졌다.
높은 몸값이 걸림돌
시장에선 HMM의 매각가가 5조~8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포스코그룹·HD현대그룹·CJ그룹·LX그룹 등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들이 인수 후보군으로 꼽혀 왔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군으로 꼽혔던 현대차그룹·포스코그룹·HD현대그룹이 인수 의사가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나머지 기업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중견기업 5파전 양상을 띠고 있다.
강석훈 KDB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6월 기자 간담회에서 ”HMM 인수에 관심 있는 후보 기업이 적지 않다”며 “HMM 인수를 통해 한국 해운 산업에 기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고 자본·경영 능력을 갖춘 업체가 인수 기업이 되길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강 회장의 바람과 달리 HMM 인수전은 중견기업들의 각축전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SM그룹이었다. 우오현 SM그룹 회장은 수년간 HMM 주식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며 인수 의지를 보이고 있다. SM그룹이 보유한 HMM 지분율은 6.56%로, KDB산업은행과 해진공에 이어 3대 주주로 올라섰다.
우 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HMM 인수 희망 가격으로 4조5000억원을 내걸었다. SM그룹은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매물로 나온 기업들을 저렴하게 사들이는 공격적 인수·합병(M&A)으로 건설업에서 해운·제조·화학 등으로 사세를 확장해 왔다.
대한해운·대한상선·SM상선·창명해운·대한해운LNG 등 해운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어 인수에 성공하면 노선·포트폴리오 확대 등 시너지와 해운 산업 재건에 대한 기대감이 나온다.
인수하면 재계 순위 껑충…관건은 자금력
하림그룹은 우군을 데리고 참전한다. 팬오션을 함께 인수했던 JKL파트너스와 다시 손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림은 계열사 팬오션을 통해 해운업을 하고 있는데 HMM을 인수하게 되면 컨테이너선 사업까지 확대할 수 있게 된다. 하림그룹은 JKL파트너스와 2015년 팬오션 인수전에서도 1조원이 넘는 인수 자금을 성공적으로 조달한 경험이 있다.
LX그룹은 종합상사인 LX인터내셔널과 물류 대행사 LX판토스를 거느리고 있어 HMM 인수 시 육상과 해상의 시너지 효과가 예상된다. LX그룹은 최근 LX인터내셔널을 통해 한국 유리업계 1위 한국유리공업과 바이오매스 발전 업체 포승그린파워의 경영권을 인수하기도 했다. 신사업 발굴과 M&A로 재계 순위를 끌어올릴 계획이다. LX판토스는 HMM의 컨테이너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동원그룹은 동원로엑스의 육상 물류, 동원부산컨테이너터미널의 항만에 HMM의 해상 운송을 더해 종합 물류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구상이다. 신사업 확장을 노리는 글로벌세아도 HMM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8년 의류 제조 기업으로 시작해 2018년 STX중공업 플랜트 부문을, 2019년 한국 골판지 1위 업체인 태림포장을 인수했다. 2022년 10월 쌍용건설을 인수하면서 M&A 시장에서 주목받았다.
관건은 자금력이다. 매각가로 5조~8조원까지 거론되고 있는 만큼 인수 후보군의 자금 조달 능력이 변수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HMM은 2023년 기준 자산 총액 25조8000억원으로 재계 19위다. HMM 인수를 검토하고 있는 곳들은 순위가 낮다.
이중 하림그룹이 27위로 가장 높고 SM그룹(30위), LX그룹(44위), 동원그룹(54위), 글로벌세아그룹(71위) 순이다. HMM의 큰 덩치 때문에 5개 그룹 중 어느 곳이 인수하든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HMM 인수에 관심을 보인 기업들이 자금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중견기업들이어서 인수 시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높은 몸값과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해운 업황도 인수 후보군에는 부담이다. 예비 입찰 서류 마감일이 8월 21일로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추가 인수 후보군으로 대기업이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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